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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7] 형제님들의 '요한' 그리고 자매님들의 '요한(안)나'라는 이름은 어떤 뜻일까요?

형제님들에게는 '요한', 그리고 자매님들에게는 '요안나'라는 세례명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사전을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야훼)’이라는 뜻의 성서 속 이름 יהוחנן(여호하난)과 그 줄인 이름 יוחנן(요하난)에서 왔다. 그래서 요한 혹은 요한(안)나라는 이름 속에는 주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양한 언어별로 표기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아랍어 يحيى (야흐야, Yaḥyā), يوحنا (유한나, Yuḥanna), 70인역(주: 70인역이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70인의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하여서, 성경 번역본 가운데 하나인 70인역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리스어 Ιωαννης(이오안네스), Ιωαννα (이오안나, 여성), 게르만어 : Johannes(요하네스), Johann(요한), Joann(요안), Johanna(요하나, 여성), Joanna(요안나, 여성), Hans(한스), 스페인어로 Juan( 후안 ), 포르투갈어 : João( 주앙 ), 프랑스어 : Jean(장), Jeanne(잔, 여성), 영어로는 Jane(제인, 여성), Janet(재닛, 여성 애칭), Joan(존, 여성), Joanne(조앤, 여성), 이태리어로는 Giovanni(조반니), Gianni(잔니), Gian(잔), Giovanna(조반나, 여성), 러시아/불가리아어로는 Иван( 이반 )으로 호칭한다고 합니다. 주로 신약성경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 또는 사도 요한을 지칭하기 위해 이 이름이 사용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세례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들 모두, 그리고 이 이름의 의미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조건이 없고, 포용할 수 있

[오늘의 복음묵상] 주님은 '아웃사이더'를 위해 오셨다.

2016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 그리스도교를 설명할 때 항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유다이즘입니다. 이 유다이즘이라는 것은, 바로 '야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유다인들 (지금은 순수 이스라엘 혈통의 사람들)을 선택하셨으며, 그들에게 토라(계명의 법)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이즘은 창조사상, 선민사상, 율법중심주의와 내세적인 구원관을 믿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유다인과 비유다인으로 구별하게 됩니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이유로 인해 차별하게 됩니다. 그 실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지역 국가들과의 갈등입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신념인 유다이즘을 고수하면서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회당(시나고가)에 모여서 매주 토라(모세오경)를 봉독하면서 종교적인 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맥락을 뒤집으려고 노력하십니 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명하시는 사렙타의 과부와 나아만 장군은 그 실례가 됩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사렙다"의 과부와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 모두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순종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음을 중심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그 믿음이 미치는 은총에는 민족적인 '예외'가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하셨습니다. 루카복음에서 기술된 주님 말씀의 뜻은, 결국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복음이라는 뜻을 다시금 확증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아웃사이더'를 위해 오셨습니다. 기존의 정치, 사회, 이념적인 고정관념에 의해 배제된 그런 '아웃사이더'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들도 동일한 인간이고, 그들도 동시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더욱이 어떤 배경과 선입견 없이 그들을 봐야한다는 점을 알려주시기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6] 형제님들 세례명인 '토마스'는 무슨 뜻일까요?

세례명 '토마스'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요? 어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전에서 토마스라는 이름의 어원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이 이름은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었던 언어인, 아람어에서 תָּאוֹמָא 'Taoma'로 지칭됩니다. 이것의 원래 뜻은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음역이 되고 분화되어서 다양한 언어로 표기가 됩니다. 그리스어로는 Θωμας, 이태리어로는 Tommaso, 스페인어로는 Tomás, 영어로는 Thomas가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토마 사도,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히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 확고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마치 '쌍둥이'라는 이름처럼 그렇게 동일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의심없이 믿는 그런 직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쌍둥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영성이란, 바로 '믿기 위해 의심한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시고자 하는 믿음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신입니다. 토마스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님들 모두 이 '믿기 위해 의심한다'는 차원을 신앙에서 진지하게 고려하신다면 좋지 않을까요?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5] 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사도'라고도 하고 '제자'라고도 하는 것일까요?

복음서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바로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예수님께서 즉석으로 캐스팅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보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하여서 12명의 사람들이 이른바 '사도'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의 일을 거들게 됩니다. 동시에 자기들도 여러 광경들을 목격하면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 보면 자주 '제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럴 때에 한번쯤 물어볼 수 있습니다. 과연 '사도'라는 개념과 '제자'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서로 차이가 있으면서 어떤 관계성을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제자'와 '사도'라는 호칭이 차이가 있으면서,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우선, 예수님을 '스승'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참되고 완전한 스승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교사요 스승인 예수께서 가르침도 주시고, 몸소 모범을 보이시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에 '제자'가 등장하여, 그분과 가까운 친밀감을 느끼고 그분 곁에서 항상 '배우려고 하는' 이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승'을 가까이 모시면서 '배워나가려고' 하는 이를 두고 제자(Disciple)로 호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 구원자'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직접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게 하고자 의도하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식한다면, 그분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기 위해 보내주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5] 우리가 자주 부르는 '마리아'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자주 사용하는 이 고귀한 이름 '마리아'에는 어떤 뜻이 담겨진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오늘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마리아(Maria)라는 표기는 라틴어 표기입니다. 그리고 원래의 언어들을 살펴서 표기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아람어 : مريم Maryām, 그리스어 : Μαριάμ, 라틴어 : Maria, 히브리어 : מִרְיָם Miriam, 아랍어 : مَريَمْ, 기원전 18년 경 – 서기 41년 경. 우선, 히브리어로 '마리아'는 '미리암'이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미리암'은 두 부분으로 분할해서 분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리'라는 말은, '바다'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명사 '마르'에 1인칭 단수 인칭접미사 '이'를 더하면서, '마리'에서 나아가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미리'가 됩니다. 그리고 '암'은 히브리어로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미리암'은 '나의 백성을 위한 바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인을 두고 '미리암'이라고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Sister로 '미리암'이 구약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러 구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모세와의 권위경쟁의 선두주자로 묘사됩니다만, 결국에는 모세의 권위로 양보하게 되는 그런 위치에 놓인 인물이 됩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1-10절에서는 미리암이 한센병이 걸리는 모습을 묘사하며 백성들에게 모세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을 빛나게 만든 특급 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어로 이관이 되면서, 'Mariam'으로 표기되고 라틴어를 비롯해서 이어지는 유럽어들에서 다양하게 표기되었습니다. 스페인어로는 María, 이태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4] 세례명 '모세'는 무슨 뜻일까요?

'모세'라는 세례명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여기에도 특별한 '영성'이 존재합니다. 과연 어떤 것인지 어원적이고 신학적인 분석을 통해, 영성을 다함께 발견하여 보도록 합시다.   이 모세라는 이름은 원래 어원이 이집트 콥트어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탈출기 2,10의 말씀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을 통해서 우리는 '모세'라는 이름의 뜻을 한글로 이미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을 원어인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의 단어를 라틴어로 표기하면 이렇습니다. mo/useh. 이와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자인 mo는 물(水)을 의미하고, useh는 '물로 부터 건져냈다'라는 뜻을 지닌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mouseh는 물로부터 건져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보면, 많은 이들을 돕고 그들을 '위험에서 부터 구해내었다'는 의미를 지니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등에서 모두 중요한 예언자로 간주됩니다.   이 콥트어가 히브리어로 מֹשֶׁה ‎ (moshe, 한글로 음역하면 '모쉐')가 되고, 콥트어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신약성경 70인역의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Mωϋσῆς Mōÿsēs, 모이세스 , 아랍어로 이야기하면, موسى ‎ Mūsā 가 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리스어-라틴어-현대 유럽어의 역사를 거치기 때문에, 먼저 라틴어로는 Moyses (모이세스)라고 이렇게 표기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어로는 Moïse (모이즈), 스페인어로는 Moises (모이세스), 이태리어로는 Mosè (모세), 영어로는 Moses (모세스)라고 지칭합니다.   그럼 '모세'는 어떤 영성을 지닌 '이름'일까요? 바로 '따뜻하며 굳건한 주님의 협력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소명을 감

[오늘의 복음묵상] 신앙은 언제나 '개방적인 사람'이 되라고 초대한다.

2016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 회심축일 마르 16,15-18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신앙적, 정치경제, 사회적, 사상적인 차원에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영어로는 그것을 두고 stereotype(스테레오타이프)라고 합니다. 인터넷 위키피디아에서 이 단어에 대한 어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그리스어에서 기원한다고 합니다: the Greek words στερεός ( stereos ), "firm, solid" and τύπος ( typos ), "impression". 따라서 아주 '굳고 강한 인상'을 두고 스테레오타이프, 즉 고정관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대상에 대한 아주 강렬한 인상을 원래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미 사회에서 굳게 형성이 되어서 더이상 변화가 없다는 뜻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그 변화없음으로 인해서 주로 부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라는 이름을 얻게 된 유대교 율법학자였던 사울에게도 동일하였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유대교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학파와 유연하게 해석하는 힐렐학파의 경쟁 속에서, 사울은 전자인 샴마이학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그쪽의 사상으로 다른 종교들을 바라보는 그런 고정관념을 확고히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큰 부정적인 시선으로 특히나 그리스도교라는 당시의 신생 이단을 바라보았을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그래서 유대교 율법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칼을 들고 낙타를 타고 오늘날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지나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환시를 보여주시고, 그의 그런 종교적인 고정관념을 타파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칼은 이제 그리스도교인을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니고, 고정관념들을 죽이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갑옷을 입고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 자매님들의 세례명 가운데 '엘리사벳'은 무슨 뜻일까요?

자매님들이 주로 사용하시는 세례명 가운데 많은 분들이 '엘리사벳'이라고 호칭됩니다. 성경이나 교회에서 사용되는 이름들 안에는 '길'이 있다는 믿음 하에서 이 이름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이름도 히브리어에서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있었던 인물들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엘리사벳이란 이름의 뜻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가운데 saba'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이 동사는 영어로 번역하면 'to swear'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맹세하다, 다짐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eli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el이라고 하면 주로 엘로힘, 즉 하느님을 지칭하는 축약대명사입니다. 사무엘, 에제키엘, 나타나엘, 엘리야 등등 모두 엘이 들어가면 하느님 절대자이신 분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의 합성어가 바로 Elisaba' 혹은  אֱלִישֶׁבַע (Elisheba')   (뜻:  나의 하느님께서 맹세(다짐)하신다)가 됩니다. 아랍어 전통에서도 엘리사벳을 두고  أليصابات Alyassabat 이라고 지칭합니다. 이 엘리사바 혹은 엘리쉐바라는 발음이 그리스어로 옮겨지면서,    Ἐλισάβετ (Elisabet)이 됩니다. 그래서 라틴어 이후로 프랑스어로  Élisabeth, 스페인어로  Isabel(이사벨), 이태리어로 elisabetta(엘리사베따)가 되고, 마찬가지로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아 영어로는 elizabeth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요, 남편인 즈카르야에 아내이며, 성모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사벳에게 나타난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쁨'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른바 석녀라고 할 수 있는 엘리사벳에게서 아들을 잉태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까지도 '요한'이라고 미리 정해주십니다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 세례명 '요셉'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남성교우들의 세례명 가운데 많은 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 바로 이 '요셉'일 것입니다. 이 요셉이라는 이름 안에도 다른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이 요셉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계보를 잇는 그런 구약의 요셉, 야곱의 열 한번째 아들,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으로 등장합니다. 이 두 요셉에게 모두 동일한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이 요셉이라는 이름은 우선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로부터 기원합니다. 히브리어로 יוֹסֵף, Yosef, 뜻은 "하느님께서 더하신다 (늘리신다)"는 뜻 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Y(י)가 들어가는 단어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이 야훼 하느님을 지칭하는 성스러운 네글자(Tetragram, 테트라그램이라고 지칭함)  YHWH 에 해당된다고 믿기 때문에, Y(י)로 시작되는 가운데 '야, 야훼'가 들어가면 그것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어로 넘어오면서, Ἰωσήφ (IOSEPH)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라틴어로 음역이 되어서 IOSEPH가 되고, 이것이 스페인어로는 JOSE (호세), 이태리어로는 GIUSEPPE (쥬세페), 프랑스어로는 JOSEPH (조셉)이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어와 동일하게, 영어는 JOSEPH이 됩니다.  이 요셉이라는 인물이 구약에서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열한번째 아들이다보니, 자기 위의 형들로부터 천대를 받다가 이집트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갑니다. 요셉은 꿈을 해몽해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고, 그 후에 이집트 총리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인간승리를 일군 요셉에게, 형들은 용서를 청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요셉은 그 형들을 용서해줍니다.  신약의 요셉도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약혼자인 마리아가 처녀인데 아이를 임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조용히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 세례명 '야고보'는 무슨 뜻을 지녔을까요?

주위에 많은 세례명들 가운데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 하나가 바로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라는 표기는 그리스어 Ιακωβος (Iakobos)에 가까운 한글발음입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James, 이태리어로는 Giacomo (쟈코모), 스페인어로는 Jaime (하이메), 그리고 만약에 성 야고보라고 부를 때의 스페인어는 Santiago가 됩니다. 그래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즉 콤포스텔라 지방의 성 야고보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그 밖에도 프랑스어로는 Jacques (쟈크) 등으로 표기합니다. 원래 이 '야고보'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찾아보면, 구약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히브리어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이름으로 יַעֲקֹב (Ya'aqov)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야코브'라고 발음할 수 있는데, 이것이 지니는 여러 가지 의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호하(신 또는 셨)다"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느님의 동반이 공존하는 인물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혹은 야고바라는 세례명의 다양한 해석 가운데, 믿음의 차원에서 수용하면서 견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끊임없는 보호가 이 이름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부디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라면서....

[오늘의 복음묵상] 믿음의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

2016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루카 1,1-4; 4,14-21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격언 가운데 하나가 바로 'Carpe diem' (카르페 디엠)입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였으나,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격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즐기다, 잡다, 이용하다.'라는 뜻을 나타내게 되며, 삶의 태도에 있어서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지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자주 회자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도 이런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루카 4,21) 그래서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 루카복음의 서두에 이렇게 등장합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루카 4,4) 왜 이렇게 기술하였을까요?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루카복음의 그리스어 문체는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마르코복음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합니다. 좀 더 그리스어의 느낌을 살린, 그러니까 완전히 예수라는 인물을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그분의 이야기를 접한 후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당대의 그리스어로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으려면 좀 더 복잡한 문법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의 그리스어 수업에서도 중급자 이상의 수업에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습니다. 종합하면 이 구절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의 시간은

[오늘의 복음묵상] '영적 어두움'의 역설(逆說)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마르 3,7-12 올해 다가오는 9월에는 드디어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께서 성녀의 반열에 오르신다고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특별히 아끼는 마더 데레사 복녀를 이제는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공경할 수 있도록, 성녀의 반열에 올리시겠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타고 전파되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분은 인도의 행려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도, 자신의 동료자매들도 함께 헌신하는 누가 봐도 그리스도의 제자요 사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많은 크리스천들이 인도 콜카타를 찾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도 노벨상을 수상하시던 해인 1979년  9월, 자신의 고해 신부였던 마이클 반 데르 피트(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다.” 즉, 거대하고 위대해보였던 마더 데레사의 영혼에도 깊은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의 어두움의 원인이 어떤 악령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끈기있게 찾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성식이 가능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분에게도 역시 인간으로서 지닐 수 밖에 없는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도 위안과 믿을 용기를 얻게 됩니다. '영적 어두움' 그리고 '악'은 확실히 좋지 않은 것이며, 신앙의 장애물이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에도 의심을 하게 되고, 내가 왜 이렇게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면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신앙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처럼, 악령이 되려 사람들에게 '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4] 왜 성체성사가 영어로 Eucharist인가요?

교회에서 사용되는 다수의 용어들은 거듭해서 이야기드리지만 그리스어에서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용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어 동사 가운데, εὐχαριστώ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이 동사의 뜻은 '감사를 드리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를 다시 세 부분으로 분할해서 고찰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접두사인 εὐ, 그리고 어근인 χαρισ, 그리고 동사형 접미인 (τ)ώ입니다. 첫째 접두사의 본 뜻은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근의 본 뜻은 ' 은총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접미사는 동사로 변화시켜주는 부분입니다. 다시 여기서 어근인 χαρισ를 두 부분으로 분할해서 살필 수 있겠습니다. χαρώ라는 동사가 있는데, 이 동사의 뜻은 '즐기다, 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것은 명사화시키는 어미입니다. 그래서 '즐기게 됨, 누리게 됨'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Εὐχαριστια (Eucharist, 직역하면 '감사제' 혹은 '성체성사')라는 그리스어 명사를 분할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Εὐ (좋음을)-Χαρισ (즐기게, 누리게 됨)-τια (명사화 어미) 이것이 라틴어 음역을 거친 후에 영어로 그대로 표기되어서 Eucharist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매일 섭취하는 흔하디 흔한 빵 (양식)을 두고 자신의 몸과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으신 이유가, 우리가 매일 빵 (양식)을 섭취하면서 그 '좋음을 즐기게 되는 것'처럼 그분이 '좋은 분이고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누리게 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쉬운 방편으로다가 가장 심오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물과 단어 안에 숨어있는 비범한 뜻을 알아보고 있는 이 코너를 통해, 우리가 흔하게 듣고 부르는 단어들을 우리는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지 살

[오늘의 복음묵상] "손을 뻗어라."

2016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마르 3,1-6 한 분의 절대자를 섬기는 여러 종교들을 일컫어 계시종교라고 합니다. 절대자가 진리를 직접 사람들에게 드러내서 가르친다고 해서 계시종교라고 합니다. 이런 계시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아주 특이한 계시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욱 깊이 들어가면 그 배경에는 '신인동형상론(anthropomorphism)'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아주 어렵게 들리는 이 말은, 간단하게 말해서 신이 인간과 동일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이라고 해서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신의 모습 안에는 현재 우리의 인간적인 모습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도 우리의 모습 안에는 신의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image of God)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과 오그라든 이의 '손'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둘 다 귀한 '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오그라든 '손'을 다시 펴주고자 기적을 행하십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자의 '손'은 지적을 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왜 그런 일을 우리가 규정한 안식일에 하느냐고 말입니다. 같은 '손'인데 다른 측면에서 사용됩니다. 위축되고 병들어서 외면받는 이의 오그라든 '손', 그리고 그런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기적의 '손', 이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반대와 지적을 하기 위해 사용될 '손'. 이렇게 같은 '손'이지만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의 의미를 더 심화한다면, 과연 우리의 두 '손'은 어디에 사용되고

[오늘의 복음묵상] '大道無門'과 복음의 '길'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 2,23-28 우리가 종종 듣게되는 사자성어 가운데 '대도무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연걸이 출연한 영화 제목으로도 알려져있고, 돌아가신 故 김영삼 대통령이 주로 일필휘지로 정치인들에게 선물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원래의 뜻을 찾아보니 이러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 (10~13세기경)에 있었던 승려 혜개가 자신이 깨달은 수행의 이치에 대해 기록한 문구입니다. 직역하면 '큰 길에는 문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큰 '道'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막힐 것도, 막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면 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길에는 문은 없지만 그 문은 어느 길로도 통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통하게 되면 천하에 홀로라도 거리낄 것이 없이 지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길',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제시하는 '방도'에는 특별한 '조건'이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거대한 진리가 되고,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 때문에, 이 또한 큰 '道'가 됩니다.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정을 내세우면서, 왜 금지된 행위를 하게 놔두냐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래부터 제시한 '큰 길'을 재확인하여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 2,27) 그렇습니다. 더 큰 길, 더 큰 진리, 더 넓은 방향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사소한 조건들이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메시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본래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은채, '조건만' 추구하는 방식

[오늘의 복음묵상] 복음이라는 '패러다임'의 탄생

2016년 1월 18일 월요일   마르 2,18-22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전문용어 가운데 '패러다임' (paradigm)이 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정설이라고 믿고 있던 이론에 대항하는 예외들이 제시되면서,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어서 그것이 새로운 정설이 되는 상황을 두고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이 용어는 그 자체로 어떤 뜻을 지니고 있길래, 이렇게 사용되는 것일까요? 수많은 용어들이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듯, 이 용어 역시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παραδείκνυμι ( paradeiknumi ), "exhibit, represent, expose"의 명사형입니다.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분할해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앞에 위치한 παρά ( para ), "beside, beyond" 그리고 이어지는 동사 δείκνυμι ( deiknumi ), "to show, to point out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곁에서 (새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 '(누군가 생각하는 바) 이면에 놓인 새로운 가치를 지시하는 것'. 그래서 복음은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계명 중심의 유대교 신앙에 충실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의 곁에서 새 가르침을 제시하시고, 또한 자신들이 믿어왔던 계명들의 이면에 놓인 새로운 가치를 지시하셨습니다.   기존에 유대교에서 믿고 있었던 정설에서 '단식(斷食)'은, 유대교 명절 가운데 하나인 '욤 키푸르(Yom Kippur, 히브리어로 '속죄의 날, 속량절')에 의무로 해야 합니다. 이 속량절은 보통 새해 첫달에 맞이하는 명절로, 작년에 지었던 죄를 새해에 용서받는 마지막

[오늘의 복음묵상] '성인(聖人)들도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마르 2,13-17 은퇴하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지난 2007년 1월 31일에 하신 일반알현에서 큰 박수갈채와 공감을 얻었던 말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제게 큰 위안을 줍니다. 성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고 죄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 신앙이란 점진적인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핵심을 이야기해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은총이 계속해서 믿는 이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완성을 향해 정진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완벽함'과 '완전함'을 곡해할 때가 있습니다. 완벽한 것은 전혀 결점이 없고 모든 것이 언제 어디서나 다 갖춰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빠질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반면, '완전한' 것이라고 하면 그 자체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소 흠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하게'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올바름'과 '죄인들'을 두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펼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계명을 '완벽하게' 준수하여서 어떤 흠이 없는 그런 '올바른' 사람이 하느님과 가까이할 자격을 갖춘다고 믿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런 흠이 없는 '완벽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전하면서도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더욱 우선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죄라는 '흠'이 생긴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생명만큼은 '완전한'

[블로그 소개] 안녕하십니까?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입니다.

저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부디 미약한 저의 성경묵상이 여러분들의 일상에 좋은 영감을 제공해주길 기도합니다. 감사드리며 가톨릭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박희전 루케시오 OFM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3] 왜 성경을 영어로 Bible이라고 표기할까요?

성경에 대한 한자적인 뜻은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럼 이제는 왜 영어로는 Bible이라고 표기하는 것일까요? 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여기서도 그리스어가 중요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의 가장 먼 조상이 바로 그리스어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어를 라틴 알파벳문자로 음역(音譯)해서 표기된 것이 라틴식 표기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 알파(α)가 라틴어 아(a, 영어에서 '에이'라고 발음함)에 상응하는 논리로, 라틴어화한 것들이 많습니다. 라틴어는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지방 이름이 라티움(Latium)인데, 여기서 사용되는 말이라고 해서 라틴어(Latino)라고 호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라틴어에서 각각의 유럽어들로 분화 및 발전되어서 오늘날의 주요 5개 유럽언어(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태리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영어단어 Bible 또한 동일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낱권의 책을 지칭하는 단수명사가 βιβλιον (biblion, 비블리온) 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명사입니다. 참고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는 명사에 남, 여, 중성이라는 성(gender)이 존재합니다.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들에서는 아직 유효합니다. 남성명사와 여성명사가 아직 존재하는 언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낱권들을 지칭할 때에는 '비블리온'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결과적으로는 한권의 책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권의 낱권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래서 중성명사 복수형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중성명사 복수형이 바로 βιβλια(biblia, 비블리아) 입니다. 그리고 이 복수형의 명사를 라틴어로 음역한 단어가 Biblia였고, 그것이 아직도 그대로 적용되는 언어가 스페인어입니다. 스페인어에서는 성경을 여전히 Biblia라고 표기하고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2] 성경은 왜 聖經이라고 한자로 표현하는 것일까요?

한자어로 '聖經'은 개별글자 2개가 합쳐진 형태입니다. 거룩할 성(聖), 날실 경(經) 이 두 한자의 의미를 이해하면 왜 '성경'이라고 표기하였는지 그 '뜻'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거룩할 성(聖)은 귀 이(耳)와 드릴 정(呈)의 합성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드릴 정(呈)안에 있는 입 구(口)자를 통해서 종합해서 해석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의 입(口)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귀(耳)로 잘 새겨들어서, 자신을 말씀을 하신 분에게 드린다(呈)는 뜻입니다. 이때에 아주 착하고 어진 순종적인 사람만이 자신을 100% 내어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분이 '성스러운' 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날실 경(經)은 이런 뜻을 더합니다. 이 한자는 부수인 실 사(絲)에 곧을 경(俓)이 합쳐진 합성어로 간주됩니다. 이 두 글자가 합쳐져서 무슨 뜻을 나타내느냐면, 직물을 제작하는 베틀에서 날실은 세로방향으로 놓인 실을 말합니다. 씨실이라는 가로로 놓인 실이 왕복하면서 직물(織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옷감이나 천의 근간이 되는 실이 바로 세로로 놓이는 날실이며, 그 근간 위에서 하나로 엮어주는 실이 바로 가로로 놓이는 씨실입니다. 이것을 종교나 사상에 도입하면, 핵심사상의 근간이 되는 글이나 책을 지칭하여 경(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聖經)이라는 두 한자의 조합을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간(經)이 되는 말씀이 기록된 책으로, 하느님의 입(口)으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귀(耳)로 듣고,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완전히 내어드릴(呈)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거룩한 책이란 차원에서 이전에 사용하던 성서(聖書)에서, 개신교와의 용어혼동을 피하는 동시에 좀 더 근본적인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가톨릭교회에서도 성경( 聖經)이라고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근간으로 삼고 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늘의 복음묵상] '계명(개념)'과 '생명(신념)'의 딜레마

2016년 1월 15일 금요일 마르 2,1-12 오늘날과 같이 진단방사선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에, 한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질병은 하느님의 징벌과도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악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면서,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셔서 죄도 용서해주시고 동시에 육신의 질병까지 치유해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위의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참고로 당시에는 지붕이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건초 등의 재료를 엮어서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쉽게 개폐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린 틈으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이렇게라도 나에게 다가오게 할 정도로 이 사람들의 믿음이 크구나!' 이런 순간에 반대역할을 맡은 율법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들을 치유하는 것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이고 율법을 위반하는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주는 것과 실제로 '치유기적'이 일어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이냐고 반문하십니다. 당대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개념의 교정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벌을 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그 통념에 또 다른 '지평'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을 한 예수님으로서는 훨씬 더 쉬운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통념을 뒤엎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실제로 '치유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느님 능력을 드러내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서 율법학자들을 비롯해서 당시에 조성되어 있던 그릇된 통념을 반증하는 사례를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신념'이 율법학자들과

[오늘의 복음묵상] '어머니'와 '여인'이라는 모순(矛盾)

2016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요한 2,1-12 오늘 들은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적사화입니다. 항상 기적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또한, 예수님도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가나안의 혼인잔치 기적사화를 해석할 때에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장 3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니, 4절에 예수님께서 '여인'이라고 호칭합니다. 5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기적이 성사되었다'라고 해석합니다. '어머니'께서 '여인'이라는 수모가 될 수도 있는 호칭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감내하셨기 때문에 기적이 이뤄졌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마리아의 공덕을 칭송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칭송하고 공경하는 자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대단히 권장되고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마리아를 성모, 즉 거룩한 어머니로 칭송하고 공경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 가나안의 잔치에서 등장하는 두 호칭, '어머니'와 '여인'이라는 호칭을 '모순'이라는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그래도 '어머니'가 원래의 지위이시기에 거기에 입각해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의 뜻을 보고 해석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기적은 어머니의 전구와 간청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서 예수님 자신을 증언해준 근거로 남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말씀(2,5)이 결정적인 역할이나 공헌을 했다고 해석하는 성경해석은 정확하지 않은 해석이고, 다소 성모신심

[오늘의 복음묵상] 드라마(drama)는 '손(hand)'에서부터 시작된다.

2016년 1월 14일 목요일 마르 1,40-45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출처=http://blog.naver.com/sonyh252/220061063028> 요즘 포털사이트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입니다. 종영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인터넷 뉴스들을 보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주위의 매체들을 통해 그 인기가 실로 엄청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을 그리면서, 그 때의 그 '감동'을 지금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드라마로부터 커다란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여타의 다른 드라마들도 시청자로부터 공감을 얻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제작됩니다. 원래 드라마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드라마라는 말은 역시 그리스어 명사인데, 무엇인가를 '그리다'라는 동사가 δράω (draw, 드라오, 그리다) 입니다. 그래서 영어 동사 또한 draw가 됩니다. 그리고 이 동사가 명사화되어서 δράμα (drama, 드라마)가 됩니다. 따라서, 작가가 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러면 드라마의 소재와 목적은 무엇일까요? 드라마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여러 신화들로부터 발전했다고 합니다. 신화(神話)라는 문자로 기록된 문학작품을 그리스 시민들이 모인 극장현장에서 생생하게 '다시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관객이었던 시민들이 '감동'을 받고, 신이 실제로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믿기 위해서' 그렇게 드라마를 펼쳤던 것입니다. 그럼 이 드라마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저는 '손'(hand)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작가의 '손'으로부터 대본이 되는 문학작품이 글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들

[성경, 알면 재미있다 3] 도대체 갈릴래아는 왜 복음에서 중요한 것일까요?

<The Map of Israel>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야 가운데, 성경고고학(지리학)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여기에 종사하는 학자, 성직자 등은 성경에 언급된 장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 도시들은 어떤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논리적으로 적절한 해답을 찾고자 매일 고군분투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주 듣게 되는 지명들 가운데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 출처=한국어판 위키피디아, 키워드 '갈릴래아'> 그것은 '갈릴래아'입니다. 위의 두 지도를 통해 직감하셨다시피, 갈릴레아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호수입니다. 사막성 기후의 토양에서는 저렇게 물이 고여 있는 경우에도, 저것을 두고 '바다'라고 호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παρὰ τὴν θάλασσαν τῆς Γαλιλαίας (갈릴래아 '바다' 곁에서) 이렇게 많은 '물'이 모여있는 갈릴레아 바다(호수)가 왜 복음서에서 중요한 도입부가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어부인 시몬과 안드레아부터 부르시고, 이어지는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일까요? 왜 그런 것일까요?  제 블로그의 앞선 글에서 요르단강이 신앙적으로 중요한 이유를 기술하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그 요르단 강의 거의 수원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사막 내륙에서 이 정도의 규모를 지닌 호수가 있다면, 그리고 요르단강 하류에 사해가 위치해있어 어떤 생물체도 살 수가 없다면, 결국 갈릴레아 호수에서만 여러 물고기들과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시작점'이 되는 셈입니다. 갈릴래아 호수 <이미지 출처=http://m.blog.daum.net

[오늘의 복음묵상] 영화 "검은 사제들", 구마기적(Exorcism)과 복음 선포

2016년 1월 12~13일 통합복음묵상 마르 1,21~39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멕시코 평신도형제에게 안수하시니 악령이 물러갔다는 사건사진 얼마 전에 막을 내린 영화 "검은 사제들"을 많이들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멋있고 잘생긴 배우 강동원이 부제로 나오고, 연기력으로 점철된 배우 김윤석이 구마사제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의 구마예식을 집행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라틴어 기도들(미카엘 대천사에게 바치는 기도 등)도 외우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신 교우분들이 질문을 합니다. 저런 예식이 21세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그런 구마예식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합니다. 아직도 실제로 저런 예식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비록 대다수가 구마예식에 해당되지 않고, 또한 사제 자신도 해당교구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구마예식서를 펼치고 예식을 집행할 수 없다는 점도 덧붙여 설명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대화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저는 편안하게 웃으면서 그런 대화를 받아준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구마예식은 어떤 기적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저 놀랍고 공포스러우면서도 신기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예식과 기적이 이뤄지는 것일까요? 미디어는 호기심과 관심을 유도하여 흥행을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지만, 신앙은 삶의 변화를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구마예식과 구마의 기적은, 우리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노력해도 영육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게 된 경우, 우리의 영과 육을 다시금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되돌리기 위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느님의 전능하신 권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구마예식은 당사자가 정신과적, 심리상담적인 방법과 여타의 합리적인 방법들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유나 해방이 되지 않는 경우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1] 세례성사가 왜 영어로 Baptism으로 표기가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는 언어적으로 첫째 히브리어(Hebrew), 둘째 아람어(Aramaic), 셋째 그리스어(Greek), 넷째 라틴어(Latin)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상의 언어들은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성경을 기록하고 번역하는데 사용된 언어들이며, 시대순으로 성경의 세계에 등장한 언어들입니다. 그 가운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유럽언어들과 교회용어들은 그리스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성사의 중요한 어원이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동사 가운데 βαπτώ(bapto, 담그다)라는 단어 가 있습니다. 그 단어의 사역형이 βαπτίζω(baptizo, 담그게 만들다) 입니다. 그리하여 이 동사의 명사형이 바로 βάπτισμα(baptisma, 담겨진 상태) 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주로 동사를 명사화할 때에 사용되는 어미가 바로 ~μα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사용하는 카리스마, 트라우마, 플라스마 등의 단어들은 그리스어 동사의 명사화를 통해 그렇게 해서 탄생한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현대 유럽언어별로 음역(音譯) 되고 분화되어서, 영어는 baptism, 이태리어는 battesimo, 스페인어는 bautismo, 프랑스어는 baptême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별히 기존의 종교전통이 생식기 표피의 일부를 절개하는 '할례'였고,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속하였다는 징표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신앙 안에서 '선택된 민족, 왕다운 사제'를 구별해주는 요르단강'물'에 몸을 '담그게 만들어서', 온 몸과 마음이 '담겨진 상태에 놓이는' (Baptism) 사건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아직도 이런 완전 침례를 고수하는 교파들도 있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이 간소화된 경우도 존재합니다. 유럽과 다른 여러 나라들의 성당 곁에 세례당이 별도로 존재하는 경우도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 그만큼 세례성사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

[오늘의 복음묵상] 믿는다는 것은 '만약(as if)'이 아니라 '이미(already)', 산다는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발명가인 에디슨의 달걀부화 이야기입니다. 에디슨은 암탉이 알을 품는 것처럼 자신도 품는다면 같은 병아리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실험정신과 도전의식이 백열등 발명 등의 기록적인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21세기는 스티븐 잡스의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서체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고, 애플에 입사해서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을 새롭게 창조해냅니다. 일체형 매킨토시 컴퓨터, 아이폰과 아이패드, 맥북 등등의 제품은 지금까지도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런 혁신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은 디지털 과학의 시대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와 같은 기록적인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들이 가지는 '조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리더쉽 서적들이 많이 저술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조건적 사고를 가진다면, 유사한 기적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관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위의 두 거장은 자신의 신념에 바탕을 항상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라는 부사에 늘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과학적 사고나 논리적 사고는 항상 '만약'이라는 단어부터 앞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것이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것들을 '가설'로 삼아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그런 현실을 '설계'하기 위해 사고를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미'라는 믿음의 차원은 그것을 '이미' 뛰어넘게 되어있습니다. 적어도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그 현실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요 구상된 현재입니다. 오늘의 마르코 복음에서도, 복음 저자는 이와 동일한 관점을 피력합니다. 예수님

[오늘의 복음묵상] 기쁨이라는 지평선(Horizon)을 향해서

2016년 1월 9일 토요일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가 쓴 비극 가운데 아주 유명한 것이 아시다시피 <햄릿>입니다. 덴마크의 햄릿 왕의 아들인 햄릿 왕자가, 자기의 숙부인 클로디어스와 어머니 겔투르드, 그리고 자신의 애인 오필리어와 애인의 아버지이자 신하인 플로니어스, 그리고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자신과 마지막에 검투를 치룬 레어티즈... 이들 사이에서 햄릿 왕자는 인간이 가진 여러 탐욕과 모순, 살인과 각종 죄악들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존재인지 고뇌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런 유명한 대사를 남기게 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인생에서 여타의 다른 즐거운 감정이나 측면들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햄릿 왕자는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인간군상의 표본으로 대표됩니다. 그래서 햄릿 자신도 마지막에 레어티즈와의 검투 후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감히 추정해봅니다만, 작가인 세익스피어는 이런 비극을 인간존재를 비추는 거울로 삼고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독일에서 태어난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의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이분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본주의적 공동체 건설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닌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소외와 고통들, 그것들을 뛰어넘고자 노력할 때에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인본주의적 사회공동체의 건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고뇌와 고통 이상의 '이상'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우리의 존재(Being)에 대해 집중합니다. 그래서 소유에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기쁨이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심리적 심연의 구조를 프로이드 이론에 기반해서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해방의 차원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제 신학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

[오늘의 복음묵상] 노자의 '水'와 요르단강의 '水', 그리고 예수의 '手'

2016년 1월 10일 주님세례축일 오늘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날입니다. 동양철학에서 자연물인 '水'를 의인화하여 그 덕을 칭송하는 학파가 바로 도가사상입니다. 도가사상의 대표주자인 노자(老子)는 '물'과 관련된 격언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되는 것이 바로 도덕경 8장에 나타난 '상선약수' (上善若水)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을 지니는 것일까요? '상선'이라고 함은 가장 큰 선(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따라야할 가장 바람직한 덕목을 지칭할 것입니다. 이런 가장 바람직한 선이 바로 '물'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물은 어떤 덕목을 지닌 사물로 표현될까요? 여기에는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겸손하고, 항상 주어진 공간 속에 완전히 채우기 때문에 충만하고, 주어진 그릇에 맞게 채워지면서도 그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유연하면서도 고매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아야하지 않겠냐고 생각하게 만드는 격언입니다. 그럼 여기에는 요르단강의 '水'가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고,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건너간 그 요르단강,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지니는 정체성을 지시해주는 그런 요르단강, 생식기의 표피를 절단하는 '할례'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약속의 상징물이 된 요르단 '강물'로 사람들의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축복하는 '세례'를 요한 세례자가 베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요한 세례자가 이제는 자신보다 더 큰 분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합니다. 단순히 요르단강물로 하느님과의 약속을 갱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세례를 받는 영혼에게 성령과 불(열정)을 심어주시겠다고, 강화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의 아드님, 곧

[오늘의 복음묵상] "오늘 이루어졌다."

2016년 1월 7일 복음묵상   "καὶ ἐπλήσθησαν πάντες θυμοῦ ἐν τῇ συναγωγῇ ἀκούοντες ταῦτα" (루카 4,28) 우리가 들은 루카복음 4장 28절의 원문인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청중들은 회당 안에서, 모든 말씀의 영(spirit, soul, 의역하면 '의미')이 이렇게 충만하게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의 뜻이 예수님이라는 그분 자체로 이렇게 충만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고지되었던, 오시기로 약속된 구세주이셨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는 세상에 결핍되어 있는 것을 충만하게 바꾸려고 본인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잡혀있는 사람이 자유를 얻고, 굶주린 사람이 배부르게 되며, 슬퍼하는 사람이 눈물을 거두고 기뻐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인생이 결핍에서 충만으로 변화하게 하려고 구세주가 오신 것입니다.  그럼 그런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 또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충만하게 되는 효과를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충만하게 되는 효과는 주로 정신적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공허하다거나 단조롭다거나, 혹은 메말라버렸다든지 등등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과 결핍이 있다면, 그것을 몰아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에게 부탁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진실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권능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그분도 우리의 믿음 때문에 본인의 권능을 투명하게 100프로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행사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었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단순하고 간단하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영신적으로 부족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충만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부족한 것

[오늘의 복음묵상]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016년 1월 6일 복음묵상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 유독 마르코 복음 만은 예수님의 기적사화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는 등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제자들은 그런 기적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대비되어 그려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네 권의 일반적인 경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그립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길 희망합니다. 혹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교 출신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잘 알게 하려는 목적에서 예수님을 "스승"으로 묘사하고자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반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점을 제1전제로 삼고 출발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이 인간의 모습을 지녔다는 점은 베일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결정적인 그분의 부활로 인해, 그 베일이 벗겨지면서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란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그분이 행하시는 여러 기적사화들도,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구도를 그렇게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고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생겼습니다. 루카복음은 그 반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역설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이런 이런 스토리를 겪으면서 성장하고 수난하고 부활한 예수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독자 혹은 청자들이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들보다 탄생이야기, 성장이야기 등등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묵상] 사랑이라는 감정의 특징

2016년 1월 5일 복음묵상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5000, 12 광주리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정말로 그렇게 많이 먹이신 것에 대해 기록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선은 가능한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그분이 진정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면, 이런 이야기가 한낱 허구에 불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숫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풍성하고 한이 없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5000명이라는 것은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어느 누구 하나 소외된 이가 없는, 모두를 포함하는 숫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먹이고도 남은 것이 12광주리나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넘치고도 남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제1독서와 복음, 그리고 성탄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특징입니다. 단순한 친근감에서부터 시작해서 깊은 연대감과 포용력까지도 발휘하며, 어느 상대든지 소외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닌 특징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랑을 받을 줄 모르면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아기로, 소년으로, 성년으로, 사형수로, 그리고 부활로..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 사랑은 섬멸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줄 모르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한 진리인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부디 모든 분들께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특징인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되는 경우가 없도록 애쓴다는 점을 되새긴다면, 사랑받지 못해 서운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조금 줄어들 수 있을

[오늘의 복음묵상] 요르단강이 신앙속에서 차지하는 의미

2016년 1월 4일 월요일 마태 4,12-17, 23-25 오늘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미 성인이 되셔서 기적과 가르침을 펼치시는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공생활이라고 하여서, 예수님께서 공공의 장소에서 하느님의 업적과 성경의 말씀을 해설하여 주셨던 시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주로 등장하는 배경장소가 요르단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요르단강이 중요한 것일까? 거기에는 지리적, 민족적,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지리적인 이유란, 사막성 기후에서 강이 나라 전체를 관통한다는 것은 상당한 축복에 해당됩니다. 식수와 농업용수를 강에서 공급받을 수가 있으니 얼마나 귀하고도 귀한 강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강의 퇴적작용을 통해 강주변에는 반달형의 퇴적층이 생성되어서 거기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요르단강은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강이 됩니다.  또한 민족적으로도 중요한 강(민수 32장 참조)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원래 12지파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지파들이 저 약속된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나라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12지파 가운데 대다수가 요르단강을 기준으로 할 때에 동쪽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순수 이스라엘 사람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반대로 다른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을 이민족들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또한 남쪽에 자리잡은 유다지파가 결국에는 이 12지파의 영토를 통일시킴으로써, 이 지역을 유다지파의 나라, 즉 유다이즘 혹은 유대교의 나라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그 첫째 왕이 바로 다윗이고 그의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요르단강은 민족적인 경계선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그런 강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중요한 강이 됩니다.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야, 예루살렘도 베들레헴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성전이 있고 예수님이 태어난 고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유다이즘과

[오늘의 복음묵상] 공현(Epiphany)라는 만남

2016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은, 베들레헴 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동방(페르시아 지역으로 이스라엘 기준으로 동방임)에서 찾아온 세 명의 박사(Magus, 점성술사를 지칭하는 라틴어)들이 경배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천문학적 관측이나 기타 과학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거나 신성한 일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저와 같은 점성술사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무속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눈과는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게 됩니다.  참고로 베들레헴이라는 도시명은, 히브리어로 집을 지칭하는 bet (베트), 그리고 빵 혹은 양식을 지칭하는 lehem (레헴)이라는 두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빵집, 양식이 태어날 집이라고 하여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양식이 되러 오셨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베들레헴이라는 도시명을 특별하게 여깁니다.  이와 같이 전개된다면, 결론은 단순하게 됩니다. 헤로데나 다른 로마의 황제들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서 아기 예수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을 위한 빵으로 오신 분이, 자신들의 왕권에 대항하는 인물이 되리라고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기의 형상으로 오신 분 속에, 하느님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방의 세 점성술사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뵙기에 충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요 임무가 하느님이 어떻게 미래를 펼치실 지에 대해 예측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별이나 다른 자연현상을 보고 하느님의 움직임을 예측하던 차원이, 바로 자신들의 이목 앞에서 하느님이 아기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목격하였을 때, 그런 만남을 가졌을 때에 느꼈던 놀라운 떨림은 어떠하였을까요? 공현이 주는 영적 의미는, 우리의 일반적 안목에는 아기에 불과하지만 신앙적인 안목

[성경, 알면 재미있다 2] 성경에 쓰인 언어들은 어떤 것들인가?

성경에 쓰인 언어들은 과연 어떤 것들인지 한번쯤 궁금증을 가질 만한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크게 세가지의 언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것들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그리스어입니다. 이 세가지 언어들의 특징을 각각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기원전 15세기 이후부터 생겨난 언어인데, 성경에는 기원전 8세기 이후부터 채택이 되어 기록에 활용되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5세기까지, 구약성경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고 보고 있고, 이 때에 히브리어를 이용해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람어: 이스라엘 백성이 기원전 538년에 바빌론 유배 이후 복귀하면서, 이스라엘 사회에 적극사용된 언어입니다. 주로 그 때 당시의 외교적 공용어로 사용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사용했던 언어입니다. 히브리어랑 모습이 많이 유사하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히브리어가 잊혀지고 아람어가 주로 많이 기억되게 됩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까지는 주로 구약성경이 아람어로 번역되어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스어: 당시에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그리스어와 그리스문화, 철학 등등이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역시나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잊어버린 젊은 유대인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교포 2, 3세들이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리고 살아가듯이, 유대인들도 당시에는 그리스어만 기억하였지 자신들의 모국어는 모른 채로 지냈습니다. 히브리어는 단지 회당에서 전례에만 사용되던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말까지는 히브리어 전승에 그리스어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전의 구약성경 텍스트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70인역'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를 잘 아는 유대인 성경학자들 70명에 의해 번역된 성경이라고 해서 그렇게 호칭합니다. 그리고 후에 초대교회에서, 새롭게 생성된 신약성경을 비롯하여, 그리스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의 여러권을 교회의 올바른 경전, 즉 '정경'으로

[오늘의 복음묵상] 네 복음서의 인칭(人稱)

2016년 1월 2일 토요일 요한 1,19-28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이들은 성경을 볼 때, 성경에 쓰인 동사를 먼저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말인 한글과 다르게, 성경에 사용된 언어들은 주로 언어학적으로 굴절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인 한글은 교착어(膠着語) 라고 하여서, 특정 어미가 붙었다 떼였다 하면서 단어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교착어라고 합니다. 반면 굴절어(屈折語) 는 원래 형태의 단어원형이 주변의 상황들, 즉 주어나 목적어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자기 스스로 변신을 시도하기에, 그런 모습을 굴절현상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언어들을 굴절어라고 합니다. 영어는 그런 굴절현상이 많이 퇴화된 언어이지만, 다른 유럽언어들 (독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등등)에서는 굴절현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착어를 많이 사용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유럽언어가 어렵게 다가오고, 그 반대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언어가 어렵고 혼돈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성경에 사용된 언어들이 굴절어이기 때문에 어떤 인칭의 주어를 문장의 주인으로 삼는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면서 성경을 연구합니다. 그러면 네 복음서의 주된 인칭은 어떠한가? 마르코, 마태오, 루카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지칭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는 관점이 공통된 부분이 많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아주 독특한 자기만의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칭으로 나옵니다. 공관복음은 주로 예수님의 여러 면모를 제3자가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전개하는 차원에서 '3인칭' 으로 이야기를 많이 전개합니다. 그러면 복음을 접하는 이들에게 주로 우리 믿음의 '근거'를 제시하는 차원이 나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주로 '1인칭' 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바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직접 이야기하는 자기표현 (자기계시)가 이어집니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