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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8] 세례명 '안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의 나치즘이 팽배해 있을 때에, 독일이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을 시절에 어느 유대인 소녀가 쓴 일기가 후대에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네 프랑크의 일기'입니다. 이 어린 소녀가 쓴 일기를 통해서 당시의 잔인한 나치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독일은 이 나치에 연관되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남겼던 '안네 프랑크'라는 소년의 이름인 이 '안네'는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렘브란트 ,  성전의 한나와 시므온 , 1628/29 년 ,  목판유화 , 55×42.5 ㎝ ,  함부르크 미술관 ,  독일 이 독일식 이름인 Anne는 결국 영어의 앤(Anne), 이태리어나 스페인어의 Anna(안나), 그리고 히브리어의  חַנָּה ‎(ḥannâ)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특별히 한나는 복음에 등장하는 여성예언자로, 아기 예수의 모습을 보고 시므온과 함께 놀라면서 주님의 그 크신 은총과 사랑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름 '한나'를 두고 뜻을 '주님의 은총, 은총을 입는 여인'으로 정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앤' 혹은 '안나'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면, 그 자매님들의 영성은 바로 '은총을 입은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 즉 주님의 배려로 인해 감사함을 깊이 느끼고, 또한 주님의 능력으로 인해 먼저 심신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여,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여인이 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신약의 예언자인 '한나'처럼, 그녀의 이름처럼 우리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나'라는 세례명이 주는 참된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7] 세례명 '아나스타시오' '아나스타시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시대, 즉 초기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실제로 부활하셨고, 그래서 빈 무덤이 되었고, 그리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성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로부터 이런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Anastasis(아나스타시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시절에는 그리스어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에서부터 이 용어가 유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어 동사로 ανιστήμι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아니스테미'라는 동사는 그 뜻이 '위로 서다, 부활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명사형은 αναστασις(아나스타시스)입니다. 즉, '부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이 부활을 지칭하는 의미로 '아나스타시스'라는 용어가 많이 상용되었습니다. 이제 이것이 남성이나 여성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Anastasio, 여성은 Anastasia가 되었습니다. 즉, 아나스타시오와 아나스타시아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여성의 경우에는 이 이름이 축약이 되어서 '나타샤'라고 지칭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연세가 있으신 자매님들의 경우에는 '아나다시아'라는 이름으로도 호칭이 됩니다. 이런 이름들이 동일하게 모두 '부활'이라는 의미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름을 지니신 분들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그건 분명 '부활'의 영성입니다. 부활이란 오뚝이처럼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실망이나 좌절, 고통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부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살아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바랄 수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이름과 그런 부활신앙의 대상인 우리 주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오늘의 복음묵상] 죄와 벌, 그리고 인간애

2016년 2월 28일 사순 제3주일 루카 13,1-9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마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자인 도스트예프스키는 자기가 살았던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는 모임이었던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참가하였다가, 제정 러시아의 황제로부터 의혹을 사서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사형은 면했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그는 정말로 힘들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인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창작해내게 되었습니다. 이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 앞에서는 법과 제도는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그런 비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곧 법이라는 생각에 노파를 살인하게 되었고, 이후에 시베리아 감옥에 송치됩니다. 그리고 소냐라는 여인이 마치 복음서의 예수님처럼 이 청년을 돌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그녀의 사랑에 감화되어, 원래가 무신론자였던 이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부활해서, 하느님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지극한 합리주의적 무신론에서 뒤돌아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종합하면 한마디로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첫째 사건이 바로 갈릴래아 사람들, 즉 유대인들의 학살사건입니다. 서기 93년경에 완성된 플라비우스의 ≪유대고대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유대역사를 창조 이후부터 반란(66-70년) 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을 연구할 때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써, 성서의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실었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유대고대사 제18권을 보면, 이스라엘의 5대 총독(26-36)으로 재임했던 빌라도가 두 번이나 유대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 알면 재미있다 5] 왜 동일인물을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주님'라고 칭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믿는 성자 하느님을 칭할 때에 이 네 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주님. 이렇게 네 가지의 호칭마다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동일한 인물을 지칭한다면 얼마나 흥미롭겠습니까? 그 흥미로운 세계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메시아 우리가 믿는 종교에서, 우리는 우리의 희노애락의 반복 속에서 우리를 구해줄 그런 구세주를 애타게 찾고 또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구세주를 발견한 후에 그분에게 모든 것을 아룁니다. 그런 후부터 그분은 우리의 이른바 '메시아'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메시아는 어떤 뜻을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히브리어로 מָשִׁיחַ, mashiaẖ, 마쉬아흐라고 원래 기록합니다. 그 뜻은 '기름을 부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전통 안에서, 항상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행했던 의식에서, 특별한 '향유'를 선택받은 이의 이마에 '도유'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이로서, 다른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왕이요 제사장으로 활약을 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왕으로 뽑힌 이들은 이 도유예식을 필수적으로 거쳤기 때문에, 이 '메시아'라는 단어 안에는 '왕'이라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내포되었습니다.  나아가 유다인들의 종말론에 의해, 최후의 메시아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날에야 보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유다인들에게도 메시아는 아직 도래하지 않는 단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주님을 그들은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메시아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왕, 선택된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의 역할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하느님께 경신례를 올리기로 이미 정해진 사람이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2)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6] 세례명 '테오필로'와 '테오도로'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 세례명들 가운데 주로 '테오~'로 이뤄진 이름들이 몇몇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테오필로'와 '테오도로'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들은 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테오도로 성 테오도로 이 테오도로 성인의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두 가지 명사의 합성어로 보고 있는데, 그리스어 θεός, (theos) "god" and δώρον (dōron) "gift", 이 두 명사의 합성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이 이름이 Ted, Teddy (테드, 테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을 가진 분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언행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테오필로 니코메디아의 성 테오필로 이 테오필로 역시 그리스어에서 발원한 이름입니다. 그리스어 θεός와 φιλος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전자는 하느님, 후자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이름의 뜻은 God's Love or God-inherited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는 이를 두고 테오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가진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거나 나눠주는 이를 두고, 바로 이 이름에 어울리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Amadeus(모차르트의 성, 아마데우스)도 또한 하느님이 사랑하신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기에, 이 테오필로와 같은 노선에 있는 이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독일어 계통에서는 Gottlieb이라고 하여서 Gott(God)과 Liebe(Love)가 결합된 이름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아무튼 감정적으로나 이념적, 지성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7] 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 중동에 있는 국가들 가운데 그리스도교와 가장 연관이 있는 나라는 당연히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예루살렘이 있고, 베들레헴이 있으며, 예수님의 출신지역인 나자렛과 사해 등등 성경에 등장하는 지역들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꼭 순례하고 싶어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꼭 한번은 이스라엘을 순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사용하는 국호인 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일까요? 이 국호에도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이 국호의 어원적 기원은 이렇습니다.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ישראל (yisrael, 이스라엘)로 표기하고 읽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바로 중간에 위치한 동사입니다. 이 שרר (śarar, 싸랄, to govern, to have authority) 동사의 3인칭 미완료형이 되면 yisra가 됩니다. 거기에 하느님을 뜻하는 축약대명사 אל가 붙어서,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실 것이다, 하느님께 주권이 있을 것이다'는 뜻이 됩니다. 혹은 이 싸랄 동사가 '싸우다, 투쟁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이스라엘'이라는 국호 안에는 '야훼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적 신앙과 의탁'이 담겨진 것입니다.  기원론적으로 살펴보면 창세기 32장 24절에서 28절에 나오면,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 이후로부터 항상 주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라는 공식(Formula)이 성립됩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적인 색채가 아주 강한 그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5] 세례명 '헬레나'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요?

미국의 유명한 교육가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헬렌 켈러 여사는 청각과 시각장애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 신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육을 무사히 마치면서 빛나는 지성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후에는 미국사회의 도덕성과 인권유린에 대해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미국사회를 새롭게 비춘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침내는 프랑스정부의 최고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1952년에, 미국의 자유의 메달을 1964년에 수상하면서 20세기 기억에 오래 남을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헬렌 켈러의 이름인 헬렌, 영어로는 Helen이라고 표기하는 이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세례명 Helena의 영어식 표기이고, 이 헬레나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와 그녀의 삶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과연 무슨 뜻이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헬레나라는 이름은 원래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는 원래가 그리스어   ‘ελενη (helene), 뜻은 "torch" or "corposant", 그러니까 "불꽃"이라는 여성명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일으킨 경우 그녀는 바로 그 사람의 '헬렌'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이름은 헬레나였고 그녀는 열심한 그리스도교인이었습니다. 당대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아니었고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데에는 아들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전쟁에 나가기전에 맹세한 것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인 헬레나의 역할이 여기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덕을 그리스도교에 두었기 때문에 321년 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로마제국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확산이 되었고, 그리하여 박해시기에서 벗어나서 7번의 공의회와 베네딕토회를 비롯한 수도승원이

[성경, 알면 재미있다 4] 왜 '사마리아 사람'이 착한 사람의 전형(典型)으로 등장한 것일까요?

루카복음 10장 25~37절까지 나오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위기를 겪는 이를 보고도 그저 지나간 사람들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여관에 묵게 하여 사람을 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진정한 선인(善人)의 표본이라고 여겨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복음의 이야기로부터 인해, 누구든지 응급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고 도울 원칙을 두고, Samaritan Rule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런데 한번쯤 자세히 호기심을 갖고 살펴볼 대목이 있습니다. 왜 '사마리아' 사람이 착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유다인도, 이집트인도 아닌 왜 '사마리아' 사람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이 한 일이 놀라운 일로 복음서에는 기록된 것일까요? 왜 요한복음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샘물을 건넨 것이 정말로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나중에는 주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목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이 '사마리아'에 대해 우리는 얼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호기심이 어린 질문을 갖고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과연 '사마리아'는 어떤 곳인지, 그들의 배경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지역 위치도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마리아 지역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북쪽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요르단강의 수원에 해당되는 갈릴래아 호수와 하류에 해당되는 사해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이는 과거, 40년의 유랑생활 이후 정착한 땅에서, 판관기를 거치고 사무엘을 거친 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라는 2개의 왕정체제를 겪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북이스라엘의 영토에 해당되었던 도시입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이 항상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수도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는 주목을 받을만한 도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가

[오늘의 복음묵상] 우리는 누구 편에 설 것인가?

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루카 9,28-36 결혼을 하신 많은 분들 혹은 연애를 하는 많은 커플에게 이런 설문조사를 해봤다는 기사를 다들 접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배우자(남편, 부인) 혹은 애인이 미워졌던 때가 있었는지요? 만약 있었다면 언제였나요?" 이런 설문조사를 했더니, 부인들은 남편이 가장 미워질 때를 두고, 자기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랑 같은 편이 되어서 화를 내어주길 바라지만, 남편이 솔로몬왕이 되어서 부인의 잘못을 판단해줄 때에는 정말, 남편이 '남의 편'이라는 것을 절감한다고 많이들 답하셨습니다. 부인에게는 서로가 한마음이 되는 그런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거기서 감정의 괴리가 생기면 그 때가 가장 미운 때라고 합니다. 또한 남편들은 부인이 미워보일 때가 언제인가에 대해 답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다른 집의 남편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때라고 답하였습니다. 남자에게는 사회적인 자존감이 생명이기 때문에, 자신의 위신이 타인과의 비교로 인해 깎이는 것은 결단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는 연애하는 젊은 커플들에게도 동일한 양상을 보입니다. 여자친구들은 '오빠, 나 안사랑해?'가 최고의 무기가 되고, 남자친구들은 '나 안믿어?'로 유도합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소속감과 신뢰가 가장 두텁고 깨어지지 않을 때에 서로에 대한 사랑도 성장하게 됩니다. 그 반대로 그것의 상실체험을 하면, 그 때부터 여러 가지 의심이라는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됩니다. 상대편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고, 신뢰하지도 않게 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케이스가 누적되어서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관계의 상실인 이별로 향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이런 인간사와 완전 다른 세상의 논리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복음묵상] 주, 아버지, '나'의 하느님!

2016년 2월 18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마태 7,7-12 우리나라 말 가운데 '틀'이라는 한글자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면, 어떤 물건이 형성될 수 있도록 그 테두리나 근본이 되는 물건을 가지고 '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본틀'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하고, 반대로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 '틀'이 아주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떨까요? 이 '틀'이 필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틀'이 필요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답을 하실 것이라 여겨지는 게 바로 '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틀'에만 박혀서 있어서도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마태오 복음이 바로 그런 '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다이즘, 즉 유다인들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고 계약의 겨레라는 사고방식이 기성의 '틀'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 새로운 '틀'인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존의 히브리어 성경에 나온 율법(토라,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라는 그 '틀'을 새롭게 갱신하여 주십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은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조차 없었던 '주' 하느님을, 이제는 믿는 사람이 모두가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그런 획기적인 변화를 선사해 주셨습니다. 호칭과 인식의 '틀'도 새롭게 바꿔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무엇이든지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유다이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4] 세례명 '베네딕토'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 영성사 가운데 중요한 인물인 성 베네딕토, 그분의 사상으로 인해서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생겨났고, 현재까지도 많은 베네딕토회 수도승(monachos)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퇴임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교황명이기도 한 이 베네딕토, 이 베네딕토라는 이름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네딕토라는 이름이 출현하게 된 것은 중세초기입니다. 529년에 이태리 누르시아(현재 이태리 움브리아주 노르치아 지칭) 출신인 베네딕토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과 다른 수도생활을 표방합니다. 최초의 수도원은 각자 홀로 고독한 가운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많은 유혹과 죄악을 극복하고 극기하기 위해서 단식과 애덕, 기도활동에 전념한 이들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이 파코미오 교부를 거친 후로부터는 함께 모여서 사는 Κοινος Βιος (코이노스 비오스, Common Life)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도승원이라는 뜻에서 Monastery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수도승원 제도를 서방 그리스도교 영성사 안에 확립한 분이 바로 베네딕토 성인입니다.  베네딕토라는 이름의 뜻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Bene-dictus". 이것은 라틴어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전자는 '좋은, 착한, 올바른'이라는 뜻을 지니는 것이고, 후자는 '말, 언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좋은 말, 착한 언어, 올바른 언행'이라는 뜻이고, 이것을 의역하면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왜 그러면 그분이 '베네딕토', 즉 축복받으신 분이실까요? 그것은 그분께서는 너무나도 깊이 그리고 끝까지 주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항상 간직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런 일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이탈리아 수비아코 근처의 비코바로라는 수도원에 살 때의 일이다. 그곳 수도원장이

[오늘의 복음묵상] 귀막힌 사람들, 기막힌 사건들

2016년 2월 17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루카 11,29-32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던 시리아의 '팔미라'라는 유적도시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우리 모두 안타까워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성경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도시인데, 이스라엘을 둘러 싸고 있었던 나라인 아시리아(Assyria)라는 이방국가가 통치하던 시절에 세운 도시로서, 고대 인류문명의 자취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보물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이유, 혹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이 도시가 점령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유인 즉, 자기들이 보기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우상숭배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유적들에 다이너마이트도 설치하고, 해머로 부수기도 하는 동영상을 유투브에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실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이고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선에서 볼 때에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처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가 막히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팔미라 유적지가 오늘 루카복음에 나오는 니네베 사람들에 대한 요나의 표징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니네베 혹은 니느웨 사람들이란 바로 이 팔미라와 인근 도시에 살았던 민족명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나는 하느님이 택하신 예언자였으므로, 만약 요나가 주변 이방국가에 사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표징으로서 하느님을 드러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니네베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들 또한 신에 대한 흠숭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요나를 통해 야훼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자신들이 믿는 신들로부터 절대적인 야훼 하느님으로 돌아섰다는, 회개하였다는 의미를 지칭합니다. 적어도 니네베 사람들은 귀막힌 이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부각시켜줍니다.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3] 세례명 '수산나'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서양 여성이름 가운데 자주 회자되는 이름이 바로 수잔(Susanne)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수산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파벳화한다면, Susanna가 됩니다. 이 수산나 역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이 이름 역시 히브리어로부터 처음에 기원한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שושנה Shoshannah (쇼샨나)라고 발음하게 되고,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Σουσάννα (Sousanna, 수산나)라고 표기하고 발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많은 언어권에서 Susanna, Susanne 등으로 표기하여서 여성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세례명으로 많이 선택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이름의 원 의미는 '백합속(Lillium)'에 해당되는 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산나라는 이름은 곧 '백합꽃'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결쌍이 이뤄진다고 합니다. 나아가 백합은 전통적으로 그 꽃말이 '순결, 무죄, 평범, 순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하고, 동시에 우리는 그런 꽃말과 성모 마리아의 신학이 일치된다는 차원에서, 성모님을 두고 '백합'에 많이 비유해서 교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모님께서는 순결하시고 무죄하셨으며, 평범하시면서도 순수하고 굳은 믿음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이 꽃말이 잘 어울린다고 교회전통 안에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수산나라는 이름을 지닌 자매님들에게도 같은 덕목이 자신의 인격에 내포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더 순수하고, 평범하지만 순결한 지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하리라고 믿습니다. 동시에 교회가 수여한 그 수산나라는 이름이 '백합'의 성모 마리아와 연결된다는 점에 있어서, 성모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서 그분의 도움을 통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은 자신이 더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2] 세례명 '다니엘' 그리고 '다니엘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주변을 살펴보면, '다니엘' 혹은 '다니엘라'라는 세례명을 가지신 분들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분들의 세례명인 '다니엘' 혹은 '다니엘라'에도 숨은 '영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원적인 차원에서부터 '영성적인 길'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로 דָּנִיֵּאל (Daniyyel)이 됩니다.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분할되는데, 먼저 דָּנִיֵּ(Daniy, 다니)라는 말은 판관(재판관)이라는 명사인 Dan의 1인칭 소유형 어미가 붙어서 해석하면 'My Judge (나의 재판관, 심판관)'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뒷부분인 אל은 엘로힘, 곧 '하느님'을 지칭하는 축약대명사가 됩니다. 따라서 종합하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재판관(심판자)'이시라는 의식을 대변하는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남성형이라면 Daniel(다니엘), 여성형이라면 Daniela(다니엘라)가 됩니다. 둘 다 공히 우리가 믿는 주 하느님께서 나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의 유일하게도, 이 다니엘의 경우에는 현대 언어들이 공통적으로 표기하고 발음합니다. 이태리어 정도만 Daniele (다니엘레)라고 표기하고 발음할 뿐,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의 주요 유럽언어들에서는 동일하게 다니엘이라고 호칭합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모두 공히 다니엘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구약의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기원전 597년경에 바빌론이라는 나라에 의해 유배(식민지 지배)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배 이전과 이후에 나타나는 구약성경들의 여러 책들의 내용이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다니엘서는 바빌론의 왕인

[오늘의 복음묵상] 영리(營利)하게 살 것인가, 순리(順理)대로 살 것인가?

2016년 2월 14일 사순 제1주일 루카 4,1-13 독일의 문호인 괴테는 그가 쓴 비극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우스트(Faustus, '행운의' 라는 라틴어)라는 고전 독일소설의 주인공을 빌어서, 우리가 얼마나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는 박식한 지성인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는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라는 악마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은 악마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과 능력을 파우스트 박사에게 알려줄 것이니,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은 악마의 조정에 의해 움직이는 악마의 소유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파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괴테는 문학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인 도덕관념을 강하게 교육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지니는 욕망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 질 수가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지적 영리심(營利心) 때문에 영적으로 구속된 결과를 얻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이와 반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돌더라 빵이 되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주겠다는 유혹, 속세의 모든 권력과 권세를 다 넘겨주겠다는 유혹, 하느님 아들이라는 점이 드러나도록 몸을 던져서 아버지의 보호를 널리 알리라는 유혹 앞에서 주님은 진리인 성경말씀을 통해 그것을 물리치십니다. 빵만으로 살지 않는 인간이라고, 주 하느님만을 경외하라고, 그리고 주님을 결코 시험하지 말라는 진리로 그 영리한 사탄을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순리대로 사는 삶,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증언해주셨습니다. 육적인 유혹이든, 영적인 유혹이든 어느 유혹이 더 크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느 종류의 유혹이든 우리가 어느 길을 자유롭게 선택하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6] 왜 '히브리인들'이라고 표현하며 무슨 뜻일까요?

구약성경 기록에 사용된 히브리어 알파벳 모음 성경에 자주 히브리인, 히브리 사람, 그리고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Hebrews라는 영어표현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태리어로는 Ebrei (에브레이), 스페인어로는 Hebros (에브로스), 프랑스어로는 Hébreux (에브로)라는 식으로 표기하고 발음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이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은 무엇이며,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이 말은 바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서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했던 히브리어로부터 나옵니다. 히브리어 동사 가운데  עבר Avar 이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이 동사의 뜻은 '건너가다, 넘어가다, 여행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동사의 복수명사형이 바로 עברים   (Ivrim,  이브림) 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건너가는 이들, 넘어가는 이들, 여행하고 순례하는 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자적 의미를 고려한다면, 홍해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뜻도 될 것이고, 40년간 유목민으로 광야를 '여행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건너갈 수 있었던 신앙적 원천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부터 약속을 간직한 백성이라는 자의식도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또한 어떤 이론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상이자, 노아의 증손자인 에벨을 지칭하는 말로써, 그의 후손에 속한 이들이라는 차원에서 복수명사형을 사용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집트 탈출체험을 한 1세대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통칭하는 것이며, 그들의 민족적 정통성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들과 하느님이 맺은 계약(약속) 때문에 바로 선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야곱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이 창세기에서 하느님에 의해 '이스라엘'이라고 명명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1] 세례명 '글라라'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요?

아씨시 성녀 글라라 대성당 지하에 모셔진 글라라 성녀 유해 앞에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의 영성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안에는 '자유'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글라라'입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성 글라라 봉쇄수도원의 창립자, 전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봉쇄수도원을 지칭하는 성 글라라 수도원의 최초의 영적 어머니, 이 글라라란 이름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그러했듯이, 글라라라는 이름도 라틴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12~13세기 중세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구약의 히브리어나 신약의 그리스어가 아닌 대중적인 라틴어로부터 이름을 따왔던 것입니다. 라틴어로 보면, 이 글라라는 철자가 Clara입니다. 이는 남성형용사 Clarus의 여성형입니다. 그래서 Clara입니다. 다시 이 형용사의 뜻을 살펴보면, 'transparent, clear"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라틴어 Clara가 스페인어로 와서는 그대로 Clara라고 표기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이 계란의 흰자 부분을 두고 'clara'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투명함이 백색으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태리어로는 Chiara (끼아라), 프랑스어로는 Clare (끌레르), 영어로 Clare (클레어)로 표기하고 발음합니다. 독일어로는 Klara라고 하고, 참고로 독일어에서는 '설명'이라는 명사가 Erklärung이라고 하여서, 상대를 두고 명료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설명'이라고 정의하는 독일어식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의 국문표준법상, 우리나라의 첫 음절은 ㅋ, ㅌ, ㅍ 등은 그보다 약한 소리인 ㄱ, ㄷ, ㅂ로 표기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클라라'가 되겠지만, 한국표준법에 따라서 '글라라'가 됩니다. 같은 경우로 Petrus,

[오늘의 복음묵상] 용서, 하느님의 '고객만족서비스'

2016년 2월 13일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루카 5,27-32 지금으로부터 2~3년전에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막걸리전문점 벽에 써있는 낙서 가운데 아주 인상이 깊은 글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로 연극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기도 하고, 또한 여러 인생들이 스쳐가는 그 문화적 아지트인 그 주점 벽에는 이런 시가 하나 낙서되어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만드신 신의 애프터 서비스는 용서다."  -시인 함민복-  그것을 보고 무릎을 팍! 쳤습니다. 어쩜 이리도 간명하게 모든 것을 촌철살인의 경지에서 표현하였을까? 그리고 이 시를 낙서로 남긴 이는 누구였길래, 이런 심정을 잘 이해하고 낙서를 남겼을까? 이런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한편에, 너무나도 깊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루카복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 그리고 그 불완전한 인간들이 저지르게 되는 반복적인 악습, 죄악 그래서 일탈과 중범죄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저 그 사람이 나쁘게 태어나서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영혼의 환자로, 주님을 영혼의 명의로 빗대어서 표현하면서, 그런 이들도 하느님의 '고객중심 애프터서비스'를 통해 다시금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회생가능성의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너무나 냉정하고 가혹합니다. 이런 용서라는 이상은 그저 종교시설물 내에서만 울려퍼지는 메아리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고객중심적'인지 '자기중심적'인지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손해를 보실 일도 없으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고객들인 '믿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죄, 정화와 보속이라는 '애프터서비스'를 펼치고 계시는데, 우리는 우선 그 고

[오늘의 복음묵상] 위인(偉人)이 될것인가, 의인(義人)이 될 것인가?

2016년 2월 10일 재의 수요일 마태 6,1-6,16-18 살아가면서 우리가 자신에게 묻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생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적과 목표가 뚜렷한 삶일 때에, 오늘의 가치가 더욱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순시기, 즉 부활의 기쁨을 더욱 더 크게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이 시기에, 교회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제시되는 마태오복음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아, 그대들은 위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의인이 되려고 하라."  마태오복음은 주로 유다이즘에서 갓 넘어온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들보다 '의로움'과 '위대함' 상호간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하느님의 율법과 그 율법준수를 통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인이 되는 길은 분명합니다. 많은 업적을 남겨야 하겠고, 그것을 사람들이 많이 알 수 있도록 널리 알려야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을 세세대대로 칭송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위인이 되는 길입니다. 다만, 위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나 위인으로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존재합니다.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선, 굳은 믿음을 가지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숨은 것들도 꿰뚫어보실 수 있는 그런 '절대자'라는 믿음을 강건하게 갖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도 하고, 골방에 들어가서 아버지 하느님만 아실 수 있는 기도와 정성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진정한 '신

['말'을 알면 '뜻'이 보인다 6] 왜 우리는 '알렐루야'라는 말을 자주 쓰고, 개신교에서는 '할렐루야'로 할까요?

우리가 매번 미사의 복음환호송(복음을 듣기를 반기는 짧은 후렴구)에서, '알렐루야'라고 따라하는데, 우리는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등장하는 언어는 구약의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원래가 '할렐루야'가 맞습니다. 이 할렐루야는 이렇게 표기합니다: הַלְּלוּיָהּ (Hallelluyah, 할렐루야) 이 할렐루야는 다시 2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가 이렇게 분할이 됩니다. 우선 어근을 차지하는 부분이 הַלְּלוּ(Hallelu, 할렐루)가 됩니다. 이는 원래 '찬미하다, 칭송하다, 칭찬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הלל (Hillel, 힐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면 왜 힐렐에서 할렐이 되었을까요? 이 '힐렐'이라는 동사원형이 히브리어 문법상 'Piel(피엘)' 동사변형을 거치면서 '할렐'이 됩니다. 여기서 '피엘' 동사형은, 그 목적이 바로 말하거나 쓰는 그 '주체'의 의지를 아주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할 때' (Intensive speaking) 사용되는 동사의 변형입니다. 히브리어도 동사의 어미나 모음 등이 변화되는 현상을 통해, 발화자(speaker)의 감정이나 판단, 의도를 표현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피엘' 형태의 2인칭 복수 명령법이 되면, 그제서야 'Hallelu' (할렐루)로 발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붙는 Yah(야)는 '야훼 하느님'을 축약해서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엘리야, 즈카르야' 등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되면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면 '너희 모두는 주님을 정말로, 진심으로, 찬미하고 칭송하여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원어적 표기와 뜻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0] 세례명 '카타리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자매님들 세례명 가운데 카타리나는 어떤 의미를 지닌 이름인 것일까요?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로 표기하는 이 '카타리나'는 영어식으로 표기하면 Katherine이 됩니다. 많은 경우에는 K를 C로 대체해서 Catherine이 되기도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 이름에 특별하게 연관이 되는 단어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가정을 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어 형용사 하나입니다. 그리스어 형용사 가운데 하나인 Καθαρός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Pure"입니다. 그래서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예술작품을 보고 감정의 정화를 느낀다고 해서 카타르시스(Καθαρσις)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파생되었다고 본다면, Katherine(Catherine)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에게 어울리는 영성이란 바로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태리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처럼, 부패한 교회를 다시금 '정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 덕택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다른 것을 바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예수님을 모시고자 하는' 그런 단순하고 굳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 되는 것이 바로 '카타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교우의 영성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복음묵상] 타이밍의 예술가가 되자!

2016년 2월 8일 설날 대축일 루카 12,35-40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이 Timing의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그런 시간 가운데에서, 언제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그런 판단력을 두고 이른바 Timing의 예술가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 타이밍이 적절한 것인지 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기쁨입니다. 특별한 '때'라고 내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고, 그래서 그 특별한 '때'를 즐기기 위해 내가 '나서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을 두고 바로 타이밍의 예술을 발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명절이라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때'를 위해 우리가 서로 움직이고, 인사도 나누고 그렇게 지내는 그런 시기입니다. 이렇게 기쁜 때를 우리는 직접적으로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과연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때'를 위해 움직이려는 그런 '타이밍의 예술'을 발휘하려고 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특별한 '때'를 즐기라고 하실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때'를 위한 타이밍 뿐만 아니라, 언제 올 지를 모르는 그런 '때'를 위한 '타이밍'의 예술도 발휘하기 위해, 우리의 판단력을 잘 갈고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40)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9] 세례명 '아가타'에 숨은 영성은 무엇일까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성녀 아가타의 순교수난, 1519년 作 이태리 시칠리아 태생으로 잘 알려진, 초기 3세기의 순교자이자 성녀인 성녀 아가타 순교자의 이름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그녀가 사용하는 이름인 아가타 (한글표준맞춤법상, 아가다라는 표기법보다는 아가타 가 더 맞는 표현임)를 그리스어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Άγαθή (아가떼)로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유사함을 의심해볼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어 형용사인  αγαθός 로 나옵니다.   이 형용사의 뜻은 "good, friendly, kind,  courteous, fair, honorable, etc" 이 됩니다. 또한 그리스어에는 남성, 여성, 중성이라는 언어적 성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아가토스라는 형용사는 남성형이고, 그것의 여성화는 바로 ἀγαθή(아가떼) 가 됩니다. 차후에 이를 라틴어화하면서 아마도 아가타(agatha)로 음역 했을 가능성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아가타는 이태리 시칠리아 출신이라서 주로 시칠리아의 순교성녀 아가타로 호칭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호칭이 될 것입니다. 이 순교성녀인 아가타의 인생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아가타 성녀는 순교를 당하기 앞서 계속되는 고문, 특별히 여성으로서 치욕적일 수 있는 유방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꾸준히 그리고 계속 정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후에 고대 교회부터 범교회적으로 그녀를 성모 마리아와 함께 7명의 공경할 성녀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이 성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좋은' 여인이라는 차원의 '아가타'로 그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여인이 되는 '길'이 바로 '아가타

[오늘의 복음묵상] 예수님은 밀당의 '신'이다.

2016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루카 5,1-11 마태오, 마르코, 루카복음 이 세 복음서들을 일컬어 전문용어로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호칭이 사용되었는가 하면,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작가점 시점이 상호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위의 세 버전의 복음서의 한 부분을 읽을 때에, 다른 버전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이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병렬적 비교독서'라고 지칭할 수 있습니다.  이 병렬적 독서를 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배경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단독전승, 둘째, 이중전승, 셋째, 삼중전승입니다. 단독전승이란, 복음서 하나에만 등장하는 독자전인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이중전승이란, 두 복음에서 공히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삼중전승이란, 세 복음서 공히 등장하는 부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중전승부터는 따라서 두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욱 의미가 깊이 이해됩니다. 새성경을 보면 푸른색 Boldic(굵은 글씨)으로 각 에피소드의 제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목적인 배려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곁에 괄호 안에 다른 복음서의 이름과 구절이 나옵니다. 거기에 괄호가 없다면 단독전승, 하나만 존재하면 이중전승, 두 복음서가 추가가 되어 있다면 삼중전승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게 되는 이 루카복음서의 제자소명설화는 삼중전승에 해당됩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에 공히 동일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마태오와 마르코에는 단순히 사실적인 기록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인과적인 차원에서, 주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은 따라 나섰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유독 루카복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8] 어원적으로 세례명 '프란치스코' 혹은 '프란치스카' 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2013년 3월 13일 점심식사를 할 무렵에, 저와 다른 학생형제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두번의 검은 연기, 즉 선거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번째 투표인 저녁에는 아마도 새 교황님이 당선될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녁도 거스른채로 인도네시아 형제 한명과 함께 베드로광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굴뚝에서 흰 연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추기경단의 부수석 추기경인 장 루이 토랑(종교간대화위원회 의장 추기경)께서 프랑스어 발음으로 라틴어로 이렇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아베무스 파팜! (새 교황님을 우리가 얻게 되었습니다.) .... 카르디날렘 산탐 에클레시암 로마남 베르골리오.... 프란치스쿰!" 거기서 저는 마지막, '프란치스쿰', 그러니까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다는 발언을 들었을 때, 이제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아가 그 프란치스코가 프란치스칸 형제자매들의 영적 아버지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것을 재확인하였을 때에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프란치스코로 명명하실 수 있도록 옆에서 영감을 주었던 분이, 브라질 은퇴추기경이시고 전 성직자성 장관이시면서, 우리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소속 추기경이신 클라우디오 후메스(His Em. Cardinal Claudio Hummes, OFM) 추기경님이셨습니다. 또한 이분에게 주어진 성당이 바로 제가 있는 안토니아눔 수도원의 바실리카이기에 너무나 의미가 깊었습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름인 '프란치스코'는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Franciscus라고 라틴어로 표기하는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어머니는 이름이 피카(Pica) 부인이었습니다. 이분은 원래가 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