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번 미사 전례에서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이는 초대 교회때부터 시작된 풍습이었고, 서로가 성만찬에 참여하여 빵을 함께 나누기 전에 하던 풍습이었습니다. 그런 평화의 인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기존에 성직자들끼리만 나누던 인사를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과 나누는 것으로 확대 시키면서 지금처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평화의 백성이 되고자, 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샬롬”(Shalom), 곧 평화를 의미하는 이 단어를 서로 인사할 때 많이 쓰고 있습니다. 서로 샬롬, 샬롬 그렇게 인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주 예수님처럼 성부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것, 그 사랑에 심취하는 것이 우리 신앙과 삶의 궁극적 목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평화는 그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바라거나 원하거나 고집하지 않는 마음의 가난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또는 너무나 극진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표현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다른 것은 쳐다보지 않고서 주님의 나라, 평화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 일념 뿐일 것입니다.
오늘 만나는 이 살로메 성녀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정확히 그 신원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전통적으로는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마르 16,1에 이렇게 증언합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살로메는 주님의 빈 무덤을 처음 목격한 ‘세 명의 거룩한 마리아’ 중 한 명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충실히 따른 여성 제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대 야고보 사도와 성 요한 복음사가의 어머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주님과 가까이 지냈고, 주님 부활의 목격증인이었습니다. 평화의 주님과 매우 친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주목해 봅니다. 살로메라는 이름도, 솔로몬이라는 이름도 모두가 같은 히브리어 어원 샬롬(Shalom, שָׁלוֹם)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곧 평화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뉴에이지나 불교 명상 등에서 이미지화하는 평화와 성삼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주인인가?”이라는 주도권 문제이며, 누구의 마음이 열쇠인지가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이 스스로 탐구하고 진력하여 얻는 인간의 노력이 절대적이라면, 성삼위 하느님의 평화는 그분 본성인 넘치는 사랑으로부터 우리에게 스며드는 전적으로 거져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전자는 평화를 위해 열심히 용맹정진해야 한다면, 후자인 성경적이고 하느님 나라로부터 오는 ‘평화’는 우리가 아무 것도 바라지도, 원하지도, 고집하지도 않는 ‘마음의 가난’을 통로로 삼아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태 5,3에서 말씀하신 바가 문자 그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통 주님께 의지하고 의존하고 의탁해야 할 정도로 주님께 붙들린 사람만이 참된 평화를 맛볼 수 있으며, 주님의 것들이 우리 영혼 안으로 깊이 내주(內住)하시도록 아무것도 고집하지 않는 열린 마음가짐 만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합니다.
솔로몬도, 살로메 성녀도, 성삼위 하느님 나라의 평화는 오직 자기자신의 마음에 주님께서 친히 직접 내 영혼육신 온 존재의 통치자가, 잔소리꾼이 되시도록 기어코 우리 자신을 도로 바치는 헌신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충실히 따랐던 살로메 성녀처럼, 주님께 “듣는 마음”(1열왕 3,9)만을 청했던 솔로몬처럼 우리도 그렇게 주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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