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니콜라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니콜라스(Νικόλαος)는 그 뜻이 한 마디로 ‘백성의 승리’(Victory of the people)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축약형이 바로 니콜레트, 콜레타이기에, 그녀의 이름 속에서 우리는 그녀를 통한 하느님 겸손의 승리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성녀의 일대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 지방 코르비에서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난 성녀의 본명은 본디 니콜레트 부아레(Nicolette Boilet)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니콜라오(12월 6일)에게 기도를 해서 얻은 딸이기 때문에 니콜라우스의 여성축약형으로 니콜레트라고 이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였던 로베르 부알레(Robert Boilet)는 그 지역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목공수였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수도승생활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도 어린 시절부터 수도자로서의 관심과 부르심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17세에 갑자기 양친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 베네딕토회 수도원 원장의 도움으로 잠시 다른 수녀원에 머물다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원(3회원)이 되었고 1402년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 오상축일부터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인근에 은둔소룰 짓고 은수자로서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21살부터 그녀는 홀로 은수생활을 하였는데, 어느날 코르비의 자신의 은둔소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환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성 프란치스코는 그녀에게 환시 중에서 클라라회가 초창기 정신에 따라 살도록 개혁하라는 메시지를 성 프란치스코가 그녀에게 주었던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자신의 은둔소를 떠났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1405년 8월 29일 교황 칙서를 통해 그녀가 클라라회 회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사명으로 정식으로 승인하였습니다.
어느 단체나 모임이든지 개혁은 항상 반발과 조롱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처음에 그녀가 그 지역 클라라회 개혁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기존 클라라회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초창기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 청빈 정신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407년 성녀 클라라의 회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수녀원을 설립하였으며, 가난과 단식을 실천하는 클라라수녀원을 세웠습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지역 내에서 이런 엄률수도를 원칙으로 하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이후에도 많은 수도원들을 원천적인 청빈 카리스마로 개혁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녀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한 사전 준비나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은 전무했으나, 100% 믿음의 힘과 성덕으로,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담대함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철저하고 겸손한 순종으로 개혁이라는 큰 고난에서 승리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1447년 3월 6일에 평화로이 선종하였습니다. 콜레타 성녀가 세원 개혁 클라라수녀회는 오늘날에도 계속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으며, 성녀를 통한 엄격한 청빈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핵심을 되살려놓은 것입니다.
가난이란 더욱더 미래지향적, 내세지향적, 가치중심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게 재촉하는 미덕입니다. 과연 우리는 겸손한 승리, 조용한 혁명, 믿음의 선한 싸움을 날마다 벌이고 있는지요? 오늘날 아버지 하느님을 정말 철저하게 100% 신뢰하는 영혼이 도리어 더 희귀해진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스러운 자녀인데도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끝까지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이 현세에서의 삶도 그분의 작품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강화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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