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만나볼 성인이 바로 서방의 베네딕토회 계통의 수도승원 가운데 하나인 ‘까말돌리수도회’를 창설하신 성 로무알도 아빠스(952-1027)이십니다. 이분이 세우신 수도회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도회의 영성과 창설자로 인하여 한국에 먼저 깊이 알려진 것이 아니라, 그 수도회에서 판매하는 천연화장품이 한국에 많이 알려지면서 굉장히 고가에 판매가 되면서 알려진 면이 더 큽니다. 그렇지만 이번호에서는 까말돌리 수도회의 창설자이신 성 로무알도 아빠스의 삶과 영성을 통해 제대로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분의 이름인 로무알도Romualdo의 어원과 의미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무알도는 합성어로 이뤄진 이름인데, 고대 독일어로 ‘흐롬hrom’은 ‘명예,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단valdan’은 고딕어(고트민족어)로 ‘다스리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설에서는 이어지는 단어가 고대 독일어의 ‘발트wald’라고 하여 ‘숲, 삼림’에 해당되는 말로 보기도 합니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고려해도 로무알도Romualdo라는 이름의 뜻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숲에서 숨어서 다스리는 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인께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동기가 자신의 명예를 완전히 부인하면서 숲으로 숨어드는 은수생활의 오솔길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본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지역의 세르지오Sergio 공작 가문에서 951년경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수준높은 교육을 받고 잘 자랐으나, 아버지가 토지 소유 분쟁 때문에 작은 아버지를 살해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라벤나 지방 클라쎄Classe에 위치한 성 아폴리나리스 베네딕토회 수도승원에 3년간 피신시켰습니다. 그 기간동안 성인은 정말로 진지하게 수도성소에 대해 느끼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 수도원에 20세가 되던 해에 입회하였습니다.
이 클라세의 베네딕토회 수도승원에서 살면서 로무알도 성인은 좀 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원하게 되었고, 아빠스의 허락 하에 베네치아의 은수자 마리누스Marinus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동방의 모델을 따라, 서방 수도원에서는 처음으로 고독한 은수생활에서 스승과 제자의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수도승원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무알도 성인은 약 1023년경에 까말돌리 수도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 곳에서는 기존의 베네딕토회가 해오던 장상의 지도나 규칙의 안내 없이 각자가 은수처를 갖고 생활하는 새로운 은수자 수도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수처는 로무알도 성인에게 깊은 고요 속에서 통회와 기쁨의 눈물을 하느님께 바치면서 그분의 현존을 확신하고 증거하는 삶을 숲 속에서 숨어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로무알도 성인의 까말돌리 수도원은 엄격한 고독과 침묵, 그리고 단식 등의 참회의 모습은 고대 이집트 독수 수도승생활을 모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베네딕토회의 성규를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은수처에서 식사 등을 해결하지만, 전례만큼은 공동의 경당에 모여서 함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베네딕토회의 하나의 개혁운동의 줄기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로무알도 영성은 고독이며 그것은 곧 의지적인 순교가 됩니다. 하느님과 깊이 대화하고 악마와 맞서는 영적 투쟁이 고독이라는 양식으로 표현되었기에, 고독은 그들의 은수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양식이 되었습니다. 다만 고독하더라도 서로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결코 간과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친교를 중심으로 삼는 은수생활과 수도승원의 모습을 잘 조화시킨 모습입니다.
인간은 정말 외롭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각자가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앞에 고독을 스스로 자청하면서, 이런 인간의 근본적 고독의 뿌리인 자기중심성을 깊이 관상하고 성찰한다면, 역설적으로 거기서부터 바로 사랑의 샘이 흘러넘친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로무알도 성인처럼 하느님 안에 숨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주님의 자비로 성인의 명성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이 말씀대로 사신 분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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