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패션과 문화의 도시가 바로 밀라노(Milano)입니다. 지금도 이태리에서 제일 부유하면서도 문화적으로도 힘이 있는 도시가 바로 밀라노입니다. 그리고 밀라노의 꽃은 바로 두오모 디 밀라노(Duomo di Milano), 곧 밀라노대교구 주교좌성당입니다. 이 성당의 전례는 다른 도시와 다르게 암브로시오 전례를 따릅니다. 그 암브로시오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성 암브로시오 주교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무덤도 밀라노에 있고, 최후의 만찬 성화로 유명한 벽화도 밀라노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은총의 성모 수도원(Convento Santa Maria delle Grazie) 식당에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융성했고, 지금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밀라노는 암브로시오 성인이 있어 더욱더 불멸의 도시입니다.
그러면 왜 밀라노대교구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일까요? 암브로시오 성인의 이름과 생애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암브로시오라는 이름의 어원과 영성, 그리고 그 영성이 잘 드러났던 그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암브로시오라는 이름은 라틴어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리스어에서 그 어원을 찾습니다. 그리스어 브로토스βροτός는 그 뜻이 ‘사멸하는(Mortal)’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부정접두사인 알파α를 덧붙여서, ‘불멸하는(immortal)’ 뜻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암브로토스Ambrotos가 ‘불멸하는’ 이라는 뜻이지만, 암브로시오도 큰 차이가 없이 ‘불멸하는 이, 불멸하는 이들의 모임에 속한 이’라는 뜻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기에 그렇게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생애가 ‘불멸의 업적을 남긴 하느님의 사람’이었나요?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가 왜 밀라노의 상징이 되었는가 하면, 그는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자기가 일하던 지방의 장관인 프로부스(Probus)의 추천에 의해 370년에 밀라노의 집정관(로마 공화정 때에, 행정과 군사를 맡아보는 장관을 말함)이 되었습니다. 그가 밀라노 집정관이었을 때에 당시 주교는 바로 아리우스주의자(성자가 성부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성부에게 종속적이라며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던 서방 로마 가톨릭의 대표적 이단)였던 아욱센티우스(Auxentius) 주교였습니다. 그가 사망하자,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신앙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밀라노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집정관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으로 대화를 통해 화해를 추구하자고 역설하였습니다. 당시 비신자였던 암브로시오의 이런 연설과 접근이 의외로 정통 신앙주의자로부터 지지를 받음으로써, 그가 밀라노의 후임 주교로 선출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세례를 받고, 8일 후인 373년 12월 7일에 주교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시오가 밀라노대교구장이 된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었고, 여전히 아리우스주의와 여러 이단에 동조하는 이들을 다루는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개입해야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였고, 자신이 주교직을 감당하기에 부당하다고 느꼈을 무렵에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행정과 법원으로부터 떠나서 주교직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제 내가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것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만 하였다.” 이후부터 성경과 교부들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엄격한 금욕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들은 지속적으로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내놓을 것을 종용하였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불멸의 항쟁을 끝까지 전개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행동 원칙에 따라 사목을 수행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황제가 있지, 교회 위에 황제가 있지 않다”며 교권이 세속 군주보다 더 상위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불멸의 투쟁과 굳건한 신념에 충만한 설교가 387년 부활절에 성 아우구스티노를 마니교로부터 회개시켜 그로부터 세례를 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밀라노 교회의 전례개혁을 단행하였고, 자신이 직접 지은 찬미가들과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여러 전례텍스트들을 추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는 밀라노대교구의 전례는 암브로시오 전례라고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397년 성 금요일에 암브로시오는 그의 두 팔을 벌려서 마치 수난과 부활의 십자가 모양을 하며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암브로시오 성인 명의로 되어 있는 대성당에 묻혀 있습니다. 1298년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께서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교회박사로 선포하셨고, 지금까지도 교부학이나 교회사에서 아주 큰 업적을 남긴 불멸의 성인으로,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분으로 깊은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께서 여러 이단과 로마 황제의 압박 앞에서도 굳건한 신앙과 불멸의 수호정신을 지키셨기에,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유지, 보존되고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부패하고 어려운 사회 속에서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태산같이 높았어도 절대로 그리스도교의 이상인 주님께 대한 항구하고 굳건한 신앙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교회가 혼란 속에 휩싸여 있어 암담해 보일 때, 암브로시오 주교의 글과 영성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다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를 무척이나 존경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신 암브로시오 성인은 여러 이단들에 맞서 아주 열정적이고 특별한 교회의 수호자이셨습니다. 여러 위험이 모든 것을 좌절시키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의 용감한 용사요 교회의 충직한 스승이신 분이 암브로시오 성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저의 아버지처럼 공경합니다. 그분께서는 제게 세례를 주심으로 저를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이 지닌 가톨릭신앙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고, 그분의 담대한 용기와 그분의 고통들과 그분이 설교와 사목활동 가운데 그분에게 가해졌던 여러 위협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과 교회와 그리스도를 본질적으로 깊이 사랑했던 암브로시오 성인을 통해 오늘날 바람처럼, 연기처럼 흩날려 버리는 우리의 신앙을 반추해 보도록 합시다.
“만약 교회에 황금이 있다면, 교회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성 암브로시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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