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에서 요나 예언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요나 예언자가 활동할 무렵은 기원전 8세기 무렵이며, 이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이웃 강대국인 아시리아제국(Assyrian Empire)이 정치적, 종교사회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니느웨 혹은 니네베(Nineveh)는 그 아시리아제국이 수도로 삼은 도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제국의 심장부에 해당되는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시리아 제국에서 아주 큰 도시로서,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요나 3,3) 거대한 성읍입니다. 이런 성읍에 '요나'라는 이름을 받은 예언자가 파견되는 것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나' יוֹנָה Yonah는 그 뜻이 "Dove"(비둘기)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대개 모든 이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함을 의미하고, 또한 희생제물로서도 아주 저렴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속죄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발에 묶어서 보내기 때문에, 좋은 메신저라는 표징(Sign)이 됩니다. 그리고 그 화답의 편지를 묶어서 다시 되돌려보내면 주인에게 돌아가는 비둘기로 묘사됩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축복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므로, 그 반대의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파견되는 메신저로 비둘기가 표징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의 메신저, 비둘기 '요나' 예언자는 그러나 아주 담대한 예언을 합니다. '사십일 후에 니네베 성읍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려는 표징의 차원에서 사십일이라는 숫자가 사용된 것이지, 실제로 40일이라는 시한적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니네베 사람들은 실제로 말의 이면을 알아듣고 바로 야훼 하느님께로 회심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은 그렇게 우리에게 분명한 진리를 가르쳐주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의 것도 알아듣도록 초대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말씀 자체도, 그 말씀의 이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3)
우리가 충실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충실히 듣지 않으신다는 상호 성실성의 의무가 동시에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충만케 하고자 하시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와 청원을 들어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회개와 충만, 그리고 평화와 표징 모두 상호 순환적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양방향적이라는 점을 깊이 새기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표징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성사(Sacrament)의 차원으로 만물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십니다. 요나 예언자도 하느님의 성사이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하느님의 성사가 되십니다. 가장 큰 '요나 비둘기' 메신저가 되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목소리에 항상 귀기울여야 하겠지만, 더욱이 이런 은총의 회개시기에는 더욱 더 응당 그렇게 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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