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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Mercy)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깊이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있게 살펴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과연 자비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 깊이를 이해하였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하느님이 말씀하신 자비가 일면 비슷하면서도, 또 일면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자인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의 뜻은 이렇습니다. 현자인 부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인간 욕망 속에 있는 집착이며, 이를 수덕으로 끊어버리고, 진리의 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순환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자비심은 그 어떤 집착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순백의 사랑으로 이 오욕칠정에 사로잡혀서 허우적대는 중생들을 구해내는 것이 자비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가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죄악의 굴레 속에 있는 인간을 구하고자 직접 죄악의 굴레 속으로 뛰어드시는 모습이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살짝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보기 좋게 창조하셨다는 하느님의 선(Bonus)을 대전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너스로 인해서 우리가 비록 죄악의 굴레에 갖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현상황이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영어단어 Mercy의 어원을 보면, 월급, 보수, 상품을 뜻하는 Mercedem이라는 라틴어 단어의 소유격 Merce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 뜻은 'reward, wage, pay' 등의 뜻입니다. 그리하여 보상과 댓가라는 의미도 함께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하심과 우리의 한계를 서로 교환하는 차원이 바로 자비이며,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의 나약함을 서로 견주어 보았을 때에 더 나은 길을 선택하는 것도 자비인 것입니다. 자비심이 촉발하게 되는 원인을 보는 관점이 서로 상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루카복음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1-32)
당신의 선성과 당신의 전능하신 치유력과 우리의 나약하고 병든 마음을 서로 교환하는 차원의 상호 순환적 자비심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본 상태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현상만 주목할 뿐입니다. 우리는 의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이고,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민족들이며, 하느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회개자들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죄를 지었든, 죄를 지은 형제가 그대의 눈을 바라보고 자비를 청했는데도 그대의 자비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도록 하십시오. 나는 그것으로 그대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그분의 종이며 그대의 종인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어느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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