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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시편 51,17)
오늘의 말씀에서는 단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서 58장은 단식에 관한 예언 가운데 아주 의미가 깊고 중요해서 자주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과거에는 단식이 그저 자신들이 야훼 하느님의 계약으로 선택된 백성임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리 하였습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이사 58,3)
그러다보니 자동적으로 DNA로 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사람도 아닌 대접을 받았습니다. 완전히 이방인이요 낯선 이로 냉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 58장에 이르러서는, 단식이 그저 하느님 백성임을 자랑하기 위한 표시가 아니라, 누구든지 하느님께 대한 통회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 조차도 단식을 해야 하였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이제는 이방인도 낯선 이도 야훼 하느님께 대한 단일한 신앙 속에서, 더욱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 전에는 단식 자체가 뽐내기 위한, 자랑하기 위한 목표가 되었다면, 그 목표는 이제 상대화가 되고, 되려 자선을 이루기 위해 자비심과 통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차원에서 단식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쉽게 우리의 욕심을 더 우선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재빨리 되돌아가고자, 욕심의 단식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죄악이 최대의 문제로 인식이 되지만, 사실 하느님에게는 죄악이 최대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돌리고, 발길을 돌리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통회하는 이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성찰해보아야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보다 죄악의 문제에 더 골몰하고 있는 채로, 사랑의 마음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속죄하는 마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도 13,48) 모든 사람을 채찍과 병고의 자극제와 통회의 정신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10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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