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월요일(다해)
오늘 우리는 '불의'에 대해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의'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반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요?
일단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의 정의(Justice)를 제1독서 다니엘서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니 9,4-5)
이렇게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맺어진 쌍방준수의무의 당신 계약과 그에 수반하는 계명들을 우리가 지키지 않는 것을 두고 '불의'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지키는 것을 두고 '정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구약 전반에도 그러하고,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적 심판론이 강력한 성경에서도 나오듯이, 하느님께서는 전통적으로 '상선벌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른 신들처럼 인간을 대상으로 '상선벌악'만 챙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시고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 (시편 79,9).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를 베푸실 때, 그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빛나십니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이 점을 높이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불의'와 '정의'가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선벌악적인 하느님만 강조하고, 불의와 정의만 강조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타동적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에 조건이 많이 달리고, 주석이 많이 달린다면, 우리 속담처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라는 차원으로 주객전도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루카복음에서는 이 본질을 더욱 심화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 6,36-37)
왜 정의를 따지고 불의를 따지실까요? 그것은 바로 쌍방향으로 '공감'이 순환하는 연결고리를 항시적으로 세우고자 하는 하느님의 원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번 인간과 약속을 맺으시고 인간과 협업을 하시겠다 선포하신 그분께서는 그래도 계속해서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이 인간에게 충만히 채워지는 모습을 보시고 기꺼워하실 것이고, 당신 이름이 영원히 빛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을 즐겨 하고자 하십니다. 그렇기에, 표면상의 정의와 불의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있는 본질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불의'라는 항목과 현상의 이면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혹시 '계명'에 발목이 잡힌 상태는 아닐까요? '회심'한다는 것이 주는 실질적인 효과는 바로 '~이면에' 있는 본질과 근원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러한 기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시편 1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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