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약속을 주십니다. 계약을 주시는 것이며, 그 계약의 규모도 몇억 몇십억 빌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땅 전체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큰 감격이었겠습니까? 우리는 놀라우신 하느님의 생각에 경탄할 뿐입니다. 동시에 언제나 구원사 속에서 신실하신 당신의 모습을 펼쳐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하시고 지키시는 방법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이사야서 55,8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사상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과연 하느님 생각의 깊이는 인간 생각의 깊이와 천지차이이며, 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하느님 경외라는 엘로힘계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처럼 자녀나 약속의 보증을 한동안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2독서는 자기변모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분으로부터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는 물어봐야 합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기도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하는 것이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하느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속좁은 내가 더욱 더 개방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느님과 더 깊은 유대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지, 상대가 변화되도록 촉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나의 관점을 변화시키고, 나의 자세를 변화시켜, 내가 왜 하느님과 일치를, 내가 왜 형제자매들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나라는 자아의 몰골을 관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일상관상이 기도의 목적이요 근본이라는 점도 바오로 사도는 아울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거룩한 변모에 대한 복음입니다. 미리 부활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거룩한 변모처럼 내 안에 깊은 신성이 여지없이 밝게 드러나는 것을 두고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묵직하게 나와 함께 하시고, 기도로서 언제나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에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영광속에 있을 때에 우리를 어둡게 만드는 온갖 죄악과 부정적인 시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부활을 이 세상에서 앞당겨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거룩한 변모는 단순하게 예수님의 것으로 그냥 그치는 설화가 아니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왜 사랑하시는 제자들 가운데 3명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그들이 그래도 예수님 말씀의 뜻을 잘 알아들을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엉뚱하게 이스라엘 민족들이 위대하게 여기는 두 예언자, 모세와 엘리야에 견주어 예수님을 인식하지만, 성부의 음성은 그보다도 더 위대하신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깨닫도록 하십니다. 이 결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여느 예언자나 위대한 성인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점을 믿게 된다면, 우리 또한 거룩한 변모의 예수님처럼, 우리 안에 내재된 신성이 극대화되고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복선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별히 이렇게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우리 성소의 모티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모되어 제2, 3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우리의 성소입니다.
불가에서는 등신불이라고 있습니다. 생전에 법력이 컸던 스님을 글자 그대로 불상화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스님의 육신이 실제로 그대로 불상이 되는 것이 등신불입니다. 한 스님이 다른 불자들이 공경할 불상이 된다는 차원, 존재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구원자가 된다는 우리 프란치스칸 성소가 그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실하시고 더 위대하신 그런 하느님이라는 야훼계의 유일신앙을 바탕으로, 엘로힘계와 같은 자기변모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등에 업고, 우리는 거룩한 변모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그런 프란치스칸 형제 자매들이라는 점이 오늘 말씀의 전례의 메시지입니다. 부활은 그저 예수님의 부활기념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들은 죽더라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는 믿음의 케리그마처럼, 우리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도 궁극적으로 거룩한 변모처럼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늘 간직하는 것이 이번 사순 제2주일의 메시지이자, 우리 성소의 근간이 되겠습니다. 언제나 기도와 헌신의 정신으로 우선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지, 나의 자아는 혹여라도 변모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하여 형제 자매들과의 일치도 저항하는 나의 자아가 아닌지 깊이 성찰해볼만한 사순 제2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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