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아녜스, Francisco de Zurbarán (1642) |
1월 21일 오늘은 로마의 순교자 성녀 아녜스 기념일입니다. 기원후 3~4세기경에 살았던, 로마시대에 유명했던 한 순교성인이 바로 성녀 아녜스입니다. 그녀는 로마의 귀족 가정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평소 늘 하느님께 대한 순결한 삶을 바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로마제국의 제45대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할 때, 신자임이 드러나 총독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총독이 괘심죄를 들어서 그녀를 로마의 매음동굴로 보내는 형벌을 내렸지만, 성녀 아녜스는 영웅적인 용덕(勇德)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정결을 성공적으로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성녀 아녜스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이런 성녀 아녜스의 삶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이름의 뜻이 한몫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그녀의 이름의 어원이 갖고 있는 뜻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아녜스는 Agnes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그 어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 형용사 ἁγνός(하그노스)는 그 뜻이 'pure, chaste, modest, innocent, blameless'에 해당됩니다. 이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맑고, 소박한, 겸손한, 순수한, 떳떳한'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아녜스라는 이름의 뜻을 풀어보자면, '맑고 순수하게, 소박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성녀 아녜스가 보여줬던 모습대로, 이 이름을 가지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들 앞에서 가식없이, 투명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그런 기품이 있는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유념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순수와 순결을 생각할 때, 흔히 착각하는 것이 아무런 결점이 없는 무결점주의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강조하였습니다. 유물론이란, 오직 물질만이 세상을 구성하는 유일한 재료라는 뜻을 주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 마음을 동요시키는 여러 가지 감정들, 심지어 사랑까지도 모두 무용지물이라는 물질중심주의로 환원시켜버리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사랑 중심주의를 전개하고 있고, 그런 사랑으로부터 물질이 탄생하였다는 창조론적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결/순결문제를 두고서 위와 같이 물질중심주의적으로 본다면, 다른 두가지 성격이 서로 혼합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시점을 강조할 것입니다. 이는 거의 완벽주의와 세심증에 다다르기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방향으로 그리스도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19세기말의 영국 성공회 출신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귀하여서, 추기경좌에 오른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은 이렇게 정결에 대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는 순결한 자를 사랑하는 이로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대상에 대해 끝까지 충실한 사람을 사랑하는 참된 사랑을 사랑하는 이를 아끼고 사랑하신다.'
아녜스라는 세례명/수도명이 주는 영성은 이렇습니다. 무엇보다 정직하고 투명한 여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성(sexuality)에 대해서 국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이 자신이 마주하는 하느님과 타인 앞에서 정직하고 투명한 여인이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소박하고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아녜스라는 이름이 주는 뜻처럼, 누구 앞에서 과시하면서 상대를 무시하는 그런 거만한 여성이 되서는 안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로부터 비난도 받지 않으면서, 떳떳하게 살아가는 당당한 여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정직, 겸손, 떳떳함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아녜스라는 이름의 영성이 되겠고, 이를 새기고 살아갈 때, 비록 피로 순교하는 로마의 성녀 아녜스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 시대의 숨은 성녀 아녜스들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사랑이 완전한 여인이 될 필요는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성녀 아녜스와 아녜스라는 이름의 영성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