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늘의 복음묵상] 언제나 긍정과 희망에 가득찬 신앙인의 인생여정

다해 대림 제2주일

제1독서: 바룩 5,1-9; 제2독서 필리 1,4-6.8-11; 복음: 루카 3,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묵상해 볼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교 구원의 기본원리입니다. 바로 무엇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인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서는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지켜야할 가장 기본원칙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거룩한 믿음을 견고하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수퍼파워이신 하느님께 대한 유일신론적인 의지입니다. 그분께서는 진정 전능하시고, 자애로우시고, 또 항상 우리 인생의 고단함을 위로해주실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것을 진정 믿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가 있었지만, 그 시기에 부르짖었던 탄원을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도와주셨다는 것을 믿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원된 민족들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순환고리가 생기게 됩니다. 시편 118편 26절 말씀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라고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상 시편 86편 16절의 말씀처럼,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은총이 넘치는 하느님,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야훼중심적인 믿음에서 희망의 싹이 움트게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26편 5절의 말씀처럼, "눈물로 씨뿌리던 자들이 기쁨으로 거두리이다."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일단 우리 구원은 희망으로, 그것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진실이 넘치는 하느님께 거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원리를 다시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2독서에서는 이것을 좀 더 심화시켜서 우리를 사람의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과 영원한 우정을 쌓는 길로 초대합니다.  필리피서 1장 10-11절의 말씀처럼,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우정을 통해 확실한 희망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고 바오로 사도는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막연하게 희망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과 교제를 시도함으로써, 더 깊이 그리고 더 멀리 구원의 희망을 키워나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하느님께서 보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청하는 차원에서, 보이는 아드님께 직접 아뢰고 친교를 이루는 차원으로 훨씬 더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의 외연이 이제 우리의 형제요, 친구요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와 친구의 정을 영원히 나누는 것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 아주 괄목할 만한 주안점이 됩니다. 이로써 새로운 구원계획, 새로운 구원의 길이 우리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분과의 영원한 우정이라는 인간적인 오솔길을 통해서 말입니다.

마침내, 요한 세례자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되는 세례를 통해, 이제 구원의 길이 가까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루카 3,6). 그래서 세례를 통해서 이제는 더욱 구체화됩니다. 그분과의 친교가 더욱 더 가까워지고, 더욱 더 실현가능한 상태로 갈 수 있고, 더욱 더 확고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막연한 기대와 희망과 믿음보다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말로 그분께 순종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좀 더 인간적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신적인 차원으로만 남았더라면, 너무 막연하고 뜬구름잡는 듯한 추상적인 상태로만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이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보이는 분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차원이 됩니다. 그분의 교회, 그분의 성경, 그분의 성체와 성혈, 그분의 봉사자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희망을 희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적/교회적 신앙의 핵심내용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한번 신앙의 지혜에 대해 숙고해봅시다. 이 대림시기를 통해서, 우리의 첫째 과제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강화하고, 우리가 진정 구원의 희망을 믿으며,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을 아주 소중한 선물로써 이해하는 길을 재확인하는 데에 있습니다. 삶의 고된 피로와 어려움 속에 우리의 발걸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다시 일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합시다. "이제 구원을 모든 이들이 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대림시기동안 반드시 숙고해봐야할 과제이며, 대림시기를 맞아 살펴볼 신앙과 삶의 소중한 지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의 인생은 항상 희망, 희망, 희망 속에 머무는 길입니다. 이 가장 중심적인 기본을 망각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항상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고불변한 원칙은 바로 언제 어디서나 긍정적으로 삶의 여정에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모든 분들께서 그런 용기와 축복을 받으시길 바라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구원의 희망을 가장 확실히 키워줄 수 있는 이 거룩한 성찬례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8] 세례명 '소피아' (Sophia)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 제가 어린 시절에 문방구에 가서 물건을 살 때면, 항상 저보다 더 나이가 많았던 형들이 그 문방구에서 옆의 소피 마르소의 사진으로 코팅이 된 책받침을 많이 사가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미모가 출중하고 많은 이들의 여신으로 추앙받을 만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옆의 사진이 근래의 사진이라고 하며, 어린 시절의 전설의 사진들을 검색하여 보면, 지금 여느 아이돌을 능가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정말로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표기하면 Sophie Marceau가 됩니다. 프랑스어식 발음으로 '소퓌 마~르소'가 되겠구요. 특별히 그녀의 이름인 이 'Sophie'는 서양에서는 아주 많은 이름이고, 이것은 우리가 살펴볼 '소피아'의 프랑스어식 변형이라는 점을 알아두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이 이름은, 영어로는 Sophie라고 해서 불어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그리스어나 독일어에서는 Sophia라고 하며, 그리고 러시아어 등의 슬라브어 계열에서는 Sofia 혹은 Sonia(소냐)라고 합니다. 그래서 슬라브계열의 여성 이름들 가운데 소냐가 많은 경우가 있는데, 이 'Sonia(Sonya)', 즉 '소냐'라는 이름은 모두가 Sophia, 즉 소피아라는 이름의 변형이라는 점을 알아두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럼 이 소피아 혹은 소냐라는 이름이 지니는 뜻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이름은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Σοφια (Greek)라고 하는 여성명사에서 기원이 되었는데, '소피아'라고 읽고 그 뜻은 '지혜' (智慧,wisdom)입니다. 원래 이 소피아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던 단어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파르메니데스 등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이 그렇게 갈구하던 단어이고, 서로 저마다 자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9] 세례명 '율리오/율리아' 혹은 '율리안나 (율리아나)'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루카복음 20장 25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루카복음 20장 25절 말씀 형상화 "카이사라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이것은 바칠 것이 있다면 그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드리는'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당시 세금논쟁을 예수님과 벌이고자 하였던 로마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사실 그 카이사르의 것도 주님의 것이기는 하지만, 카이사르가 가져야할 몫을 부정하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도로 바치는 마음가짐이 요구된다는 점을 부각시킬 때에 많이 회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 공화정 시대에 실존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이 '카이사르'라는 말은 로마 시대의 통치자, 황제를 지칭하는 호칭이었기에, 그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 '율리우스(Julius)'라는 라틴어로 된 남성의 이름입니다.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은 바로 제우스 (Zeus) 신입니다. 그리고 로마신화로 넘어오면, 그 신은 바로 주피터 신(Jupiter)이 됩니다. 그래서 '율리우스(Julius)'라는 이름은 바로 이 신중의 신, 왕중의 왕인 주피터 신에게 자신을 봉헌한, 자신의 모든 것을 도로 바친 남성을 두고 '율리우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성의 이름을 바로 율리안나(율리아나, 쥴리엔, Julien)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신인 '주피터'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도로 바친 사람으로서, 로마공화정의 최고의 통치자로 역할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또한 반대로 '주피터' 신이 그를 통해 모든 권능을 부여한 사람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1] 세례명 '글라라'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요?

아씨시 성녀 글라라 대성당 지하에 모셔진 글라라 성녀 유해 앞에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의 영성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안에는 '자유'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글라라'입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성 글라라 봉쇄수도원의 창립자, 전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봉쇄수도원을 지칭하는 성 글라라 수도원의 최초의 영적 어머니, 이 글라라란 이름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그러했듯이, 글라라라는 이름도 라틴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12~13세기 중세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구약의 히브리어나 신약의 그리스어가 아닌 대중적인 라틴어로부터 이름을 따왔던 것입니다. 라틴어로 보면, 이 글라라는 철자가 Clara입니다. 이는 남성형용사 Clarus의 여성형입니다. 그래서 Clara입니다. 다시 이 형용사의 뜻을 살펴보면, 'transparent, clear"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라틴어 Clara가 스페인어로 와서는 그대로 Clara라고 표기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이 계란의 흰자 부분을 두고 'clara'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투명함이 백색으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태리어로는 Chiara (끼아라), 프랑스어로는 Clare (끌레르), 영어로 Clare (클레어)로 표기하고 발음합니다. 독일어로는 Klara라고 하고, 참고로 독일어에서는 '설명'이라는 명사가 Erklärung이라고 하여서, 상대를 두고 명료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설명'이라고 정의하는 독일어식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의 국문표준법상, 우리나라의 첫 음절은 ㅋ, ㅌ, ㅍ 등은 그보다 약한 소리인 ㄱ, ㄷ, ㅂ로 표기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클라라'가 되겠지만, 한국표준법에 따라서 '글라라'가 됩니다. 같은 경우로 Pet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