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 Jacek Oniszczuk, SJ (1966.07.06~2017.12.22) |
2018년 1월 새해를 기뻐하며 즐기는 가운데 저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뉴스를 접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성서신학부 학부장 야첵 오니주크 (Jacek Oniszczuck, SJ) 신부님께서 성탄절 방학에 이태리측 알프스 지역으로 트랙킹을 나가셨다가, 급작스러운 눈사태로 선종하셨다는 이야기었습니다. 성서신학부 학생들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분이 가장 젊고 유능한 요한복음 교수이기도 하셨고, 젊은 나이에 학부장도 맡을 정도로 미래가 밝은 젊은 폴란드 예수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가진 이라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한 인간이라는 점이 다시금 각인되는 그런 슬픈 시간이었습니다. 그분과 깊은 대화나 그분의 요한복음 주석수업을 들어보지 않았던 저로서는, 한편으로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봄이 와서 장례미사를 함께 드렸고, 다시금 그분을 추모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다시금 성서신학 과정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모든 동료 교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도 그분을 수업시간 가운데 추모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공교롭게도 그분의 이름인 이 야첵 (Jacek)이라는 이름이 지닌 기원적 의미가, 그분의 그런 생애와 맞닿아 있음을 다시금 보게 되었습니다.
이 야첵이라는 이름은 폴란드어이고, 원래의 언어는 그리스어입니다. 그리스어로 ὑάκινθος (히야킨토스, 남성명사)에 해당되며, 이를 라틴알파벳화한 이름이 Hyacinth 혹은 Jacinth가 됩니다.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에서는 Jacinto (하신토)라고 부르고, 폴란드어에서는 Jacek (야첵)이라고 하며, 이태리어에서는 Giacinto (지아친토)라고 부릅니다.
히야신스 (Hyacinth Orientalis) |
이 이름은 봄에 피는 여러가지 꽃들 가운데, 아스파라거스 목에 속하면서, 백합과에 속하는 '히야신스' (Hyacinth)로부터 기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히야신스라는 꽃에 얽힌 그리스신화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로마신화 가운데 등장하는 한명의 신이 이 아폴론입니다. 어느날 이 아폴론이 아끼던 '히야킨토스' (Hyakinthos)라는 소년과 원반던지기를 같이 하였습니다. 아폴론 신은 이 소년을 매우 애지중지하고 아끼던 바였습니다. 이 때에 서쪽의 바람을 관장하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 (Zephyros)가 바람을 세게 불게 하여서, 그 원반이 땅에 떨어졌다가 그만 히야킨토스에게 떨어져서 소년은 피를 흘리며 죽고 맙니다. 그리고 이 피를 흘린 소년의 자리에서 좌측의 꽃인 히야신스가 피어났다고 하는 것이 기원입니다.
히야킨토스의 죽음 |
그렇게 자신의 피의 댓가로 피어난 백합과의 향기 짙은 꽃이 바로 이 히야신스 꽃입니다. 히야킨토스가 제피로스 신의 질투로 불의의 죽음을 당하였던 것처럼, 제 학부장 신부님이셨던 야첵 신부님이 불의의 눈사태로 선종하셨던 것처럼, 이 히야킨토스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가 불의의 사고나 남의 질투로 목숨까지도 잃어야 하는 경우를 피할 수 없다는 인간의 현실을 '기억'하게 하는 목적이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 (1585-1640) |
또한 15세기 전후에 있었던 이탈리아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 (1월 30일)의 생애를 보아도 이런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성녀가 20살이 되던 해에, 성녀가 마음에 품고 있던 귀족출신의 남자를 성녀의 질투심 많던 동생이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래서 성녀는 충격을 받고 히야친타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에 입회한 후에 10년 정도 지났을 때에 큰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성녀는 어릴적부터 타고난 성인의 기질을 지니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런 불의의 사고들과 병마들을 만나고 난 후에 성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회개자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많은 아프고 병든 이웃을 돕는 데에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이후 15세기 유럽에 페스트 (흑사병)이 돌았을 때에도 성녀의 도움을 통해서 많은 이가 치유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히야친토/히야친타의 이름을 가진 이들의 삶을 본다면, 이 이름이 지니는 영성은 무엇일까요? 우선, '불행을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사실 인간으로서 불의/불행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행합니다. 또 불의합니다. 왜 정의롭고 공정한 것들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데 불행과 불의가 더 많은 것일까요? 단순히 인간이 나약하기 때문인 것일까요? 오히려 여전히 하느님께서 많은 부분을 관장하신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셈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냥 '불행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모두 히야친토/히야친타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 그 불행을 향기로운 '꽃'을 피우기 위한 토양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냥 불행을 불행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대해 하느님께 반항을 한다면, 무신론자들과 이교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이는 삶의 자세가 달라야 한다는 점에서, 히야친토/히야친타의 이름을 가지신 형제, 자매님들은 불행/불의를 선행/선의로 재창출하는 대단한 생명력의 소유자가 되셔야 하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시고자 더욱 더 많이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히야신스의 꽃말인 '기억'처럼, 다음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쓰러뜨리려 그렇게 밀쳤어도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셨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시편 11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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