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에제 2,9-10)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이라고 해서, 우리나라가 한일합병조약으로 인해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된 참으로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35년간 우리는 치욕적인 식민지의 아픔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시점까지도 그 잔재들이 말끔히 청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현안으로 사회가 아직 완전히 강건히 일치되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제치하의 잔재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분단현실과 안보불안, 경제위기와 중국-미국간 분쟁 속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불안한 상황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렇듯 어느 한순간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들에겐 비탄과 탄식만 가득한 상황 속에 처한 것은 성경 속의 남유다 예루살렘 사람들을 기원전 598년에 식민지로 복속시킨 점과 닮아있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열강이었던 바빌론 제국으로 인해 잠식당했고, 자신들의 신앙도 빼았기고, 희망도 잃어버린 그야말로 비탄과 탄식으로 가득한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부르시며 위와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왜 에제키엘을 부르신 것이었을까요? 그건 그의 이름 속에 담긴 뜻을 알면 쉽게 풀립니다.
에제키엘이라는 이름은 원래 히브리어 동사로 hzq (하자크, 뜻은 강화하다, 힘을 불어넣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이 동사의 3인칭 단수 미래형으로 '하느님께서 힘을 불어넣으신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을 강화하신다'는 뜻에서 이름이 yĕḥezqʾēl (예헤즈키엘)로 되고 이것이 영어나 다른 유럽언어화 과정 속에서 간단히 에제키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에제키엘이라는 예언자의 이름 혹은 우리의 세례명 속에는 하느님께서 약해진 우리를 강하게 다시 만드신다는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강하게 만드신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복원에 대한 희망'을 강화하신다는 뜻입니다. 일제치하에서도 광복을 다시 맞아 우리 나라를 원래의 한일합병 이전의 고유한 철학과 우리의 심성을 복원하고자 독립열사들께서 꿈꾸시고 그 꿈을 강화하셨던 것처럼,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제시하시는 메시지는 '복원에 대한 희망을 키워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단순히 단죄하고 파괴하며 심판하는 예언서의 내용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단죄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내놓으시는 이유에는 바로 그분께서 복원을 희망하시며, 희망에 대한 신뢰를 강하게 만드시는 분, 관계를 되돌리고자 희망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어도, 그가 자기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여,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고 강도 짓으로 뺏은 것을 배상하고, 생명의 규정들을 따르면서 불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에제 33,14-15)
언제나 복원을 희망하시며 각자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길 희망하신다는 믿음을 강화하고자 에제키엘 예언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빌론 유배기간 동안 말입니다. 마치 식민치하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해 헌신하면서 우리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대동사회'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선열들과도 같습니다.
에제키엘이라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혹은 수도명으로 사용하시는 분들에게는 이름의 뜻대로 어디서든지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공의로운 목소리를 내라고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모든 상황을 파괴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현실의 비참함을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희망'을 강화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욱 근본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야 아래의 말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진리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괴하고 새로 짓는 하느님이시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비합리적이고, 식민시대 이후의 잔재에 아직도 매여있는 사고방식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것도 이전의 고유한 우리 사상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에제키엘 이름이 주는 시대적, 사회적인 예언소명일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에제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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