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지난 주에 이어서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지니는 역사적 배경상, 계명에 나온 글자 그대로의 윤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 둘러싸인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여 주시는 새로운 계명을 중심으로 단결하면서 차별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글자 그대로의 계명이 아니라 바로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에 대한 해석이 교파별로 다양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역시 예수님의 계명 그 자체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에 열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열심히' 믿는 길을 걷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거기에서 이탈할 경우에는 구원은 없다는 식의 다소 배타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계명의 자구적 의미도 중시하지만, 이것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역사와 연결시키는 관점이 대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인과 사회에 일어나는 여러 역사적 상황과 예수님의 계명, 그에 대한 믿음,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에 대해 좀 더 현실참여적인 해석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하게'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상의 역사 내에서 교제를 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계명을 바라볼 때 계명의 표현만 바라볼 수 있으나, 계명의 정신을 바라볼 때에 진정 참된 이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전자가 개신교식 이해일 것이고, 후자가 가톨릭적 이해일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었고 변화가 되었으며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역사의식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톨릭적 해석일 것입니다.
사랑은 그냥 좋은 감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사랑은 가히 부부 사이의 자녀출산과 양육에 관여되는 그런 전반적인 헌신과 동일하게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 사랑이 바로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더욱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사랑은 동시에 형제애를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말로써 말씀을 거스르는 경우가 없는지, 다시 말해 우리의 언어로써 사랑과 계명의 말씀을 거스르는 경우가 없는지 자주 점검하라는 것도 가르쳐줍니다. 후험적인 차원 뿐만이 아니라, 예방적인 차원도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어떤 험담할 욕구가 생기거나 분노와 짜증이 섞인 언사가 자주 나올 경우에는, 그냥 그건 그것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의 원칙에 따라, 형제애를 위해서 예방의 기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분노에 휩싸여서 험한 말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이런 식의 화살기도가 더욱 더 자주 요청이 되는 것이 올바른 차원의 형제애로 이해할 수 있고, 이런 작은 사랑의 실천이 교회공동체 전체의 형제애로 번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복음은 아주 큰 것을 제시하지만,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작은 것으로 인해 큰 것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정신에는, 사랑이 개념이나 계명으로 남지 않고 우리 각자의 고민 속에 스며들어서 바로 거기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고민과 상황 속에서 가장 큰 신앙이 싹틀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일 것입니다. 가장 역사적인 것이 가장 가톨릭적일 것입니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역사 속 고민 가운데에서, 나의 감정의 히스토리 안에서 자주 화살기도로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장애도, 고통도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의 과정이라고 여기고 견딜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사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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