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아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루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호수요-
우리말 가곡으로도 유명해진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대표적 시입니다. 이 시를 두고 자주 '비유의 교과서적 텍스트'로 거명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병렬적으로 'A는 B이다'라는 공식을 가지고, 여러 가지 변화를 주면서 비유에 대해 아주 드라마틱하게 잘 표현하고 있어서, 대단히 훌륭한 시적 비유를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의심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문학과 여러 예술, 그리고 정치와 사회경제 등등 인류의 다양한 분야에서 비유는 사용됩니다. 더욱이 성경은 '비유의 보고'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비유가 너무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주변에서 속 시원하게 그 비유에 대해 설명해주는 경우를 잘 접하지 못하여서 항상 갈증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유사신흥교파에서 해설하는 비유풀이 (예: 신천지)에 현혹당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한번 제대로 성경에서의 '비유'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왜 비유가 많이 사용된 것일까? 이 비유를 해석할 때에 어떤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인가? 이런 류의 질문들입니다.
먼저 비유라는 말의 어원부터 봅시다. 비유라는 말은 견줄 비, 비슷할 유의 합성한자어입니다. 그래서 서로 달라보이는 것을 견주어 함께 보면서 공통적인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서도 유비라고 할 수 있는데, 유비라는 말 역시 먼저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견줄 수 있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결국 무언가 서로 상호간에 비슷하거나 공통된 부분이 전제로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완전히 서로가 다르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비유의 성립조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비슷한 부분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의미가 재창조되는 것이 비유입니다. 본디 '하느님'은 하느님이셨고, '빛'은 '빛'인데, 빛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공통된 믿음을 매개로 해서, '빛의 하느님'이라는 비유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빛' '아버지 하느님' '농부이신 하느님' 등등의 비유적 표현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비유는 궁극적으로 3가지 측면의 '힘'을 지닙니다. 첫째, 이해력을 지닙니다. 기존에 잘 알아듣지 못했던 것들을 금방 알아차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청자에게 친숙한 대상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메시지가 재창조되어 머릿속에 입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주와 인생이라는 가장 큰 틀 속에서 자신과 이웃, 하느님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서 우선 이해력을 형성하게 합니다. 둘째, 실천력을 배양합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길이 더 올바르고 더 선한 것인지 우리 스스로 숙고하게 만드는 기능을 비유가 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정진하도록 격려하는 힘을 비유가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실패하고 되돌아가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주님이 알려주시는 길을 따라 걷는 실천력을 배양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감력을 극대화합니다. 종교란 보이지 않는 신의 마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인간적인 매체로 전달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비가시적 신에 대한 공감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사실 모든 신앙행위들은 여기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자선, 극기와 수고 모두가 공감력을 향상하는 데에 이바지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공감할 수 있을 때에, 심지어 이웃과 가족과도, 동료 인간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고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유의 최종 궁극적인 목표가 됩니다.
이렇게 이해력, 실천력, 공감력을 배양시키길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비유적인 언어들을 많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비유라고 할 때에 명시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는 경우도 있지만, 암시적으로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봐야하는 차원에서 제시하시는 경우도 다수입니다. 어쩌면 성경에는 이 후자에 해당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감사한 것이, 성경의 비유는 일방적인 '강요'나 '강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탐구'하길 원하신다는 것도 곁들여 발견할 수 있는 그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 나와있는 글자나 숫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톨릭적 관점인 '역사' 중심적으로 바라보면서, 과거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였고, 그래서 이런 삶의 방향을 역설하였으며, 오늘날 이것을 읽는 나는 어떤 것에 공감하는지에 대한 숙고를 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차원의 비유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유의 세가지 '힘'은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의 핵심메시지로 다시 귀결됩니다.
"사랑하라, 너 자신을, 네 이웃을 네 하느님을!"
우리는 사랑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고, 수많은 지식과 학위와 재산보다 결국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코린토 1서의 바오로 사도의 메시지와 연결된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 하나면 충분합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