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세계은행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전세계에 아직도 아동영양실조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좌측에 나와있는 지도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경제적으로 자립도가 낮고 주로 후진국 그룹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나라들은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비율이 상당히 적습니다. 그것은 기초 식자재들 조차도 시카고 농산물 세계경매시장에서 여러 상품처럼 경매를 하게 되는데, 자본력을 지닌 다국적 기업들이 그 곡물들을 매수매입하면서 시장에서의 가격을 자신들이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많이 얻기 위해서 가격을 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미국 등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나라들은 매년 쌀이나 밀을 과잉재배해서 남아도는 것들을 사료화를 하거나 아니면 매장해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면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공급량이 부족해서 기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장 가격에 맞출 만큼의 자본력이 없는 나라의 시민들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시민 혹은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아는 그래서 벗어나야할 재앙입니다.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단식'은 어떤 차원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원래 성경에서 말하기를, 현세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은 '음식'을 거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짐승들과 들짐승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먹어야' 사는 존재들입니다. 오직 신적인 존재들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상적인 존재들보다 신적인 존재들이 도덕적이나 능력면에서도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죄라는 것은 지상적인 존재들이 주로 지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의 양자관계로 한정해서 생각해보면, 죄라는 것은 주로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빗나간 길로 치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개라는 히브리어는 '다시금 길을 되돌아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되돌아와서는 반성의 표정을 보여야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물로 된다면 양이나 비둘기 등의 속죄제물이었고, 행위라고 한다면 자루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또한 단식을 해서 다시금 신적인 존재인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행위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렇게 신적인 존재에 다시 한걸음 다가가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 단식의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수평적으로 해석하여서, 굶주리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나누는 적선행위, 자선행위도 단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식의 목적이 주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지, 그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나 다른 율법학자들과 주 예수님께서 논쟁을 빚는 장면들이 묘사된 연유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현대로 오면서 이제는 '단식'이 '공동체적 정의감'과 연대해서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끼고 절제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동시에 그것을 통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나눌 수 있는 물질적 도움의 재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돼지저금통도, 가난기금도 모두 이런 '단식'의 사회적 해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무슬림에게도 단식기간인 '라마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율법에 많이 강조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단식을 하게 되는 동안에 자선을 많이 하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무슬림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알라 하나님의 계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이 우리가 믿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단식의 의미와 활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회적 재분배 기능으로 '단식'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순절이나 다른 특별한 기간에 '단식'을 한다는 점에 대해, 그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임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원래 성경에서 말하기를, 현세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은 '음식'을 거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짐승들과 들짐승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먹어야' 사는 존재들입니다. 오직 신적인 존재들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상적인 존재들보다 신적인 존재들이 도덕적이나 능력면에서도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죄라는 것은 지상적인 존재들이 주로 지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의 양자관계로 한정해서 생각해보면, 죄라는 것은 주로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빗나간 길로 치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개라는 히브리어는 '다시금 길을 되돌아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되돌아와서는 반성의 표정을 보여야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물로 된다면 양이나 비둘기 등의 속죄제물이었고, 행위라고 한다면 자루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또한 단식을 해서 다시금 신적인 존재인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행위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렇게 신적인 존재에 다시 한걸음 다가가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 단식의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수평적으로 해석하여서, 굶주리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나누는 적선행위, 자선행위도 단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식의 목적이 주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지, 그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나 다른 율법학자들과 주 예수님께서 논쟁을 빚는 장면들이 묘사된 연유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현대로 오면서 이제는 '단식'이 '공동체적 정의감'과 연대해서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끼고 절제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동시에 그것을 통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나눌 수 있는 물질적 도움의 재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돼지저금통도, 가난기금도 모두 이런 '단식'의 사회적 해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무슬림에게도 단식기간인 '라마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율법에 많이 강조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단식을 하게 되는 동안에 자선을 많이 하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무슬림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알라 하나님의 계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이 우리가 믿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단식의 의미와 활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회적 재분배 기능으로 '단식'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순절이나 다른 특별한 기간에 '단식'을 한다는 점에 대해, 그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임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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