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Palme d'Or)을 수상한 작품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지요? 현재까지도 아주 유명한 영화, 바로 '미션'입니다. 1986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로, 로버트 드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한 아주 선이 굵고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여기서 주인공 가브리엘 신부 역할을 한 배우가 바로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입니다. 예수회 선교사제 역할을 담당하였던 그는 처음에는 단순한 사제였으나, 과라니 부족을 제압하려는 불의와 폭력에 맞서면서 칼을 뽑아드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연히도 그의 성과 이름인 '제레미'와 철 혹은 금속을 뜻하는 '아이언스' (Irons)를 동시에 잘 표현한 작품을 만났던 것입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추기경은 하느님의 정의를 생각하긴 하지만, 교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하는 수 없이 식민지 지배자들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신부만큼은 원래 하느님의 말씀이 가르쳐주었던 정의에 대한 역사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맞서게 됩니다. 바로 불의의 역사 앞에서 정의로 맞서 싸우며 고발하며 앞장서는 모습에서, 오늘 우리가 알아보려고 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름의 뜻을 먼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4대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 가운데 한 파트를 차지하면서, 북과 남으로 갈라져 있던 2개의 왕국(북부 이스라엘 왕국, 남부 유다왕국)을 위해, 약 기원전 650년경에 태어난 예언자가 '예레미야'입니다. 이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יִרְמְיָהוּ(Yirmiyahu, 이르미야후)라고 합니다. 이것은 해석하면 '야훼 하느님께서 일으키셨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또한 원형동사로 추정할 수 있는 רָמָה(ramah, 라마, 뜻은 'to throw' 던지다, 겨냥하다)를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뜻은 '주님께서 겨냥하셨다'라는 뜻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부패와 타락과 불순종을 범하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왕국을 '겨냥해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부르고 보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건의 의지로, 그릇되게 흘러가던 역사에 대한 고발의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라는 한 개인은 매우 유약하고 부족한 인물로 표현됩니다. 이 예레미야서는 그래서 한 연약한 인간의 고백록(회고록)과 같은 성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0~20장 참조) 그리고 한 개인의 영적인 내적투쟁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15장 18절)
그렇지만, 그가 하느님의 공적인 업무, 즉 송사(rîb, 히브리어로 '고소, 고발'이란 뜻)에 몰입하게 됩니다. 마치 검사처럼 하느님을 대리해서 백성들의 잘못을 고발합니다. 이 송사에서는 바로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지만, 두 왕국은 그분의 자비를 저버리고 지냈기 때문에 이제부터 재판에 돌입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진정 불의에 맞서는 인간적인 '검사' 예레미야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참조한다면, 예레미야라는 히브리어 이름의 영어식 표기가 Jeremy(제레미)라는 점을 고려해서 볼 때에, 그 이름을 가진 배우가 그런 캐릭터인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의 역할을 맡아서 열연했다는 점은 어찌 해석하면 그저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요 '안배'에 따른 결과가 아니겠는가 믿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세례명 안에 담겨있는 영성을 말입니다.
항상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역사 안에서 정의와 불의가 맞대결을 펼칠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측의 대표선수가 등장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고뇌를 가지지만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배자의 손을 들어주었던 추기경, 그리고 그에 맞서 과라니 부족을 위해 칼을 들었던 가브리엘 신부. 바로 이렇습니다. 동시에 예레미야와 적당주의와 온정주의로 그냥 넘어가려는 당대의 사람들 간의 '송사' 고소와 고발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아주 약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동병상련을 겪는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소명의식과 역사에 대한 정의감 만큼은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오히려 마음은 따뜻하고 유약한 인간이지만, '송사'에 돌입한 정의롭고 공정한 '검사'로서의 자신의 소명의식만큼은 철저한 인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 역사신학이 돋보이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그래서 '공사구분을 아주 철저히 하는 사람'이라는 길을 걸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더욱이 불의와 정의를 혼돈하는 인물이 되어서는 결코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상처가 크고 내적 투쟁이 크더라도, 공적으로 지켜야할 원칙과 정의감을 항상 우선하는 역사의식을 발휘해야 하는 영성을 지닌 이름이 바로 이 '예레미야'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모두 뒤숭숭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인간세상에는, 그리고 현세에는 선과 악이 항상 공존하면서, 선이 악을 이기는 경우보다 악이 선을 제압하는 경우가 너무나 당연하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시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실까요? 역사의식과 신앙심을 가진 이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라고 양심의 촉구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세상에 대한 관심도도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와 신자들의 예언자적 사명'이 확인되는 논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침묵보다 오히려 진리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송사까지도 불사하는 '공정의식'의 표본,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이었고, 예언서의 내용이었으며, 오늘날 예레미야를 세례명(수도명)으로 삼고 있는 모든 이가 꼭 생각해봐야할 '인생길' (영성)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예레미야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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