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바닷가와 인접한 도시인지라 갈매기가 도심 안에서 텃새를 부리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그리고 까마귀나 비둘기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접할 수 있는 도시의 텃새들 가운데, 비둘기는 왜 하필 '평화'와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것일까요? 왜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꼭 비둘기 가운데 '하얀 비둘기'만 평화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들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바라보는 것인지 성경적으로 나름대로 풀이한다면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제가 바라보는 시선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흥미로운 해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율법서에 해당되는 레위기에 비둘기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이 많이 됩니다. 레위기 1장 14절에서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가운데 한 마리를 주님께 올리는 번제물, 즉 불에 태워 향기를 올려드리는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레위기 5장 7절에서는, 작은 집짐승을 마련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으면 대체재로 비둘기 한마리를 바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5장 10절에서 그 비둘기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속죄가 된다는 차원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유다인들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쉽게 구해서 바칠 수 있었던 제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물론 이 비둘기조차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동물이 아니라 곡물을 바쳐도 좋다는 규정도 제시합니다. (레위 5장 11절 참조) 하지만 곡물보다는 동물이 더 권장되는 번제물이자 속죄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란 다시금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 장애물들이 제거된 상태를 전제하는데, 구약적 사고방식에서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마련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도 동일한 속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동물이었다는 점에서, 비둘기를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신약으로 와서 세례라는 새로운 양태의 예식으로 대체가 됩니다. 제물을 바치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 구약의 속죄효과와 동일 혹은 그 이상의 은총상태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죄를 용서하시는 성령 하느님께서 직접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믿는 그 누구에게나 하느님이 직접 용서해주신다. 아무런 대가 없이..'라는 구원의 보편성이 강조되는 측면이 부각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믿음'에 의해 거저 받은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인해 평화 자체이신 분께서 직접 채워주시고 장애물을 없애주시니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은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고 영감을 채워주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문자가 사람을 죽이는' 차원에서 진일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화'가 처음에는 동물과 곡물로 이뤄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런 의미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서 하얀 비둘기만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그래서 도심에 돌아다니며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쪼아먹는 잿빛 비둘기들이 별로 마음에 내키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런 비둘기들을 통해 올라온 자연스러운 물음을 통해, 이런 새로운 해석도 가능할 수 있게 되니 그것도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여하튼 우리의 신앙이 '공짜선물'이라는 점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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