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장소를 여행하다가 보면 우리는 무심코 어떤 식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주 특별한 기대를 가지지 않고 늘 좋아하던 음식을 시키거나 아니면 그 집만의 특별한 요리를 주문하게 되지요. 그리고 요리가 나온 후에 한숟갈 떠서 먹어보고는 깜짝 놀라거나 아니면 아주 실망하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만약에 아주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라면, 그 음식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거나, 식당 이름을 기억하려고 하거나, 혹은 주인장에게 문의해서 요리의 재료나 레시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주 실망하게 된다면 그 집의 이름을 기억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야할 식당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게 되겠지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로 그리로 가서 식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돈이 아깝고 별로 맛도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동시에 아주 맛있는 집에 대한 입소문을 내고 모두가 그리로 가서 맛보기를 권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겠지요.
왜 성경의 기도를 설명해야 하는데 갑자기 맛집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고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정의하는 기도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를 제시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성경에서 정의하는 기도가 이 맛집의 비유와 연결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인간을 바라보기를 'homo viator', 즉 순례자 인간 혹은 나그네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여러 장소를 여행하는 것에 비견해서 바라보지요. 하느님께서 여행의 투어가이드가 되셔서 어떨 때는 직진대로로 안내하실 수도 있고, 또는 어떤 때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되는 길을 안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어 가이드를 믿고 끝까지 따라서 여행하는 순례자인 인생이라는 관조적인 차원의 표현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레스토랑을 들어가게 됩니다. 이 레스토랑(Restaurant)이라는 말은 원래 프랑스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복원하다, 부활시키다'라는 뜻의 동사 '레스토레(Restaurer)'에다 형용사형 어미인 '~ant'가 붙어서, 결국 '우리의 기운을 복원하고 부활시키는 장소'로 식당이라는 의미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종교생활이고, 그 종교를 스스로 믿고 따르겠다고 결심한 후에는 그것이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관심이 있던 요리 아니면 오래전부터 맛있게 먹던 요리가 바로 영성(Spirituality)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특정한 방향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늘 먹던 대로 아니면 늘 즐기던 대로, 혹은 새로운 관심이 가는 대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하였지만 어떤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 때에 선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특정 성인이나 특정 신심단체의 영성(방향성)을 선택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드디어 성경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의 동사가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다'라는 뜻을 주로 나타내는 두 가지의 동사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הִתְפַּלֵּל (히트팔렐)이라는 동사와 자주 연결이 되고, 신약에서는 προσεύχομαι(프로세우코마이)라는 동사가 자주 연결됩니다. 이 두 동사의 단어의 뜻은 이렇습니다. 먼저 구약에서 등장하는 동사인 '히트팔렐'이라는 동사의 뜻은 'to act as an adovcate, to make an intercession for, to pray'이라고 사전에 정의가 됩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변호자 역할을 자임하다, 누구를 위해 중재하다, 기도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듯이 다른 이를 대변하여 주 하느님께 하는 것이 구약성경적인 기도의 정의입니다. 주로 공동체성이 강조되는 차원이 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신명기 9장 26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하느님, 당신의 그 큰 능력으로 구해 내시고,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오신,
당신의 소유, 이 백성을 파멸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신명기 9장 26절, 새성경 번역본)
모세를 통해 어렵게 이집트 땅에서 구해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고 고집만 부리고 악행만 일삼게 되자, 모세는 그래도 야훼 하느님께서 노여워 하시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먼저 자기가 믿고 경험한 바에 따라서, 무엇을 피해야하는가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권고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맛이 없는 집에 먼저 가게 되어서 그 집이 잘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곳을 피하게끔 하는 역할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 집이 잘못된 점을 인식하도록 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공동체성의 증진을 위한 일이므로, 구약성경적인 기도는 많은 경우 이런 공동체적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적인 기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리스의 개체중심적 철학에 기반하여서, 이제부터는 전체적인 차원보다 개인적인 차원이 더욱 더 사상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개별화된 수준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어떻게 절대자에게 청원을 하고 주문을 하느냐의 문제로 포커스가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신약성경적인 동사 '프세우코마이'라는 동사는 주로 재귀적인 의미의 차원에서 "to petition deity, pray"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재귀적인 용법의 의미처럼, 자신이 하는 행위의 대상이나 영향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대적 존재인 신에게 부탁하거나 주문하는 행위를 나타내며, 그것을 두고 신약성경에서는 '기도하다'라고 정의하게 됩니다. 그런 경향이 아주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마태오 26장 39절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오 26장 39절, 새성경 번역본)
이 기도에 나타나듯이,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느님께 아룁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하느님께 부탁을 드리면서 주문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을 주문하고자 하는 개인의 심정처럼 말입니다. 타인이 알지 못하는 오직 그 사람만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메뉴에 대한 의견처럼, 기도를 드릴 때에 자신의 부탁과 청원을 드리되, "처음부터 자신에게 영향이 돌아올 것부터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차원으로 부탁과 청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시작부터 기대를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기도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적인 기도에서는 개인적인 측면이 강화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그 영향이 돌아올 것을 인식하지만 그것부터 구하지 않는 측면이 강조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선익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가 구가하기 위해서 서로 권면하는 측면이 바로 주변에 맛집을 추천해줘서 함께 같은 식당을 찾으려 같은 방향을 가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산스크리트어 어원으로 보자면, '질문하다, 요구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은 바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에 있고, '공감대,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맛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은 표현해 낼 수 있듯이, 기도도 언어로 언어화할 수 있는 것들은 언어로 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맛이나 감칠맛이 있는 음식처럼, 기도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있기 때문에 직접 '가서 맛봐야'하는 차원의 비언어적 교감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런 행위는 공동체를 우선해서 기억하고자 하는 행위일 필요가 있으며, 개인적인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기대부터 먼저 가지지 않고 시작해야 하는 행위일 필요가 본질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두고 참되고 올바른 기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에 부합하는지 살펴보고 그렇지가 못하다면, 우리는 더욱 더 하느님을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확실히 믿는가, 또한 그렇게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자 원하는지 그 갈망의 여부에 대해 재점검을 반드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식과 확신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기대부터 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부터 우선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맛집의 요리를 맛보고 가득한 기쁨을 만끽하고자 노력하는 이의 심정처럼, 공동체와 개인들을 위해 기도라는 '요리 주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취향에 맞는 맛집 추천'과 같이 서로에게 맞는 '영성'을 찾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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