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교우분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또한 수도사제인 저 스스로에게도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어디서부터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가?'입니다.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시거나, 준비하시는 그런 새교우나 예비교우들, 그리고 이미 신자가 되신 여러 스펙트럼의 교우들께서 질문하시는 공통의 질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되새기는 동시에 또한 기도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출발점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같이 고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기도를 이해하려면 성경적인 세계관(World-view)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다시 쉽게 말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흘러가서, 어떻게 종결되는가?'에 대한 가치체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상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창조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이 구원을 얻었다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 그리고 나중에는 주님에 의해 의인과 죄인들이 그 삶에 의해 심판을 받고, 이 지상과 천상이 모두 하나가 되는 그런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창조-구원-종말'이 모두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연속적인 '시간'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 시간을 경영하시는 분 또한 시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 세계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에서 말하는 세상창조(자연창조) 및 인간창조, 그리고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과 그 믿음, 마지막으로 요한묵시록에서 제시하는 여러 징표들을 통해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는 종말론으로 세상은 그렇게 '일직선'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이렇게 이끌고 움직이게 하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교는 절대적 신이 보여주시는 진리를 믿는 '계시종교'이며, 그분의 절대적 능력에 '힘입어'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찾는' 그런 '타력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교나 유가사상, 도가사상 등은 자신의 인격수양과 수행을 통해 '자력'으로 갱생하고 득도하는 길을 걷기 때문에, '자연종교'라고 하고 '자력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타력과는 그 경로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시간은 순환적이거나 시간의 틀을 초탈하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교리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해주는 기도의 출발점이란, 바로 이런 성경적인 세계관이 참된 진리임을 믿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능력과 희망을 가지신 분께 우리가 기댈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인간적인 바탕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해서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으로 표현하고 전하는 것이 이뤄질 때, 아시다시피 그것을 두고 '기도가 이뤄졌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깨달음'을 구하면서 가까이 계신다고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의 출발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깨달음'을 구하는 은총을 청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매일 노심초사하는 그런 의식주, 가족들의 안위문제의 속박에서 사고와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평안해 진다는 점을 자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적으로 더욱 더 기도에 분발할 수 있게 하는 촉매가 됩니다. 더 나아가 언제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능력에 기꺼이 기대는 이에게 아낌없이 베푸시는데, 당신께 청하는 것이 바로 당신을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믿게 해달라'는 요청일 때에는 더없이 기쁘게 주시면서, 거기에 더 보태서 주실 것이라는 것도 성경적인 기도의 출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순환을 통해서 점점 더 기도에 흥미를 더할 수 있게 되기에 이런 출발점이 바람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해서, 우리가 심정적으로 하느님과 가깝다는 느낌을 항상 간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도의 출발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다라는 단어, 영어로 pray가 영어의 원조격인 산스크리트어로 '질문하다, 묻다'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질문할 수 있으려면' 그 바탕에 심정적인 친밀함, 가까움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심정적인 가까움을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서 기도의 출발점인 저 성경적 세계관이 참된 것이라는 '깨달음'을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여쭐 필요가 절실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해답 뿐만이 아니라 곁들여 주시는 풍성한 체험도 수반될 것이라는 것도 믿으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되, 그 근본목적과 출발점이 이런 성경적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기도를 청할 때에 성공이나 기복적인 것만을 생각하면서 시작하지 않는가 성찰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니까 그게 가능하지요. 일반 교우들은 어려워요.'라고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지요. 하지만 성직자 수도자라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들도 위의 성경적 세계관이 혼돈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혼돈이 올 수 있는 원인은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오는 온갖 죄악과 그로 인한 영육간의 상처들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정화하고 치유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금 원천인 기도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매듭이 다시 풀리기 때문이고, 거기에서 다시 막힌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창조주, 구세주, 천상의 임금이시며 지상의 왕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점을 잊지 않고 그 점을 깊이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이 항상 성경적인 기도의 모티브가 되는 말씀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잘 유념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 6:33, 200주년 신약성서)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