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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죄와 벌, 그리고 인간애



2016년 2월 28일 사순 제3주일

루카 13,1-9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마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자인 도스트예프스키는 자기가 살았던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는 모임이었던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참가하였다가, 제정 러시아의 황제로부터 의혹을 사서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사형은 면했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그는 정말로 힘들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인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창작해내게 되었습니다. 이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 앞에서는 법과 제도는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그런 비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곧 법이라는 생각에 노파를 살인하게 되었고, 이후에 시베리아 감옥에 송치됩니다. 그리고 소냐라는 여인이 마치 복음서의 예수님처럼 이 청년을 돌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그녀의 사랑에 감화되어, 원래가 무신론자였던 이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부활해서, 하느님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지극한 합리주의적 무신론에서 뒤돌아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종합하면 한마디로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첫째 사건이 바로 갈릴래아 사람들, 즉 유대인들의 학살사건입니다. 서기 93년경에 완성된 플라비우스의 ≪유대고대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유대역사를 창조 이후부터 반란(66-70년) 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을 연구할 때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써, 성서의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실었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유대고대사 제18권을 보면, 이스라엘의 5대 총독(26-36)으로 재임했던 빌라도가 두 번이나 유대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후는 서기 35년경으로 예수님의 사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언급하시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사건이란 아마도 이 유대인들의 대학살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실로암은 예루살렘 동쪽 성밖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이라는 샘물을 유대왕국의 히즈키야(기원전 716-687) 왕이 터널(히즈키야 터널)로 연결하여 성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저수장(貯水場)이었습니다. 따라서 실로암 탑의 붕괴는 성벽의 붕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뜻하지 않게 당하는 참사는 모두 당사자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학살과 실로암 탑의 붕괴로 말미암은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가 당시 그곳에 살면서 죽음을 면한 사람들의 죄보다 크지 않았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사건의 잘잘못이나 죄의 대소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들을 염려하여 당장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믿은 신념과 행위에 대한 '죄와 벌'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언제든지 '벗어나서' 새로운 인간성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도, 그렇게 부활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소냐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라스콜니코프가 합리주의적 무신론자였다면, 소냐는 박애주의적 유신론자였던 것입니다. 결국에는 소냐와 같은 복음적인 사랑이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무신론자를 다시 참된 사람으로 '되살렸습니다.' 

회개를 행위와 결과로 이해하는 모습이 너무나 흔합니다. '내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런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그러니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 이러면 그게 회개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회복'이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인간애'가 되살아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잃어버렸던 어떤 감각을 다시 되찾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회개는 '행위의 중단'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적 감각의 회복'입니다. 즉, 더 가치있고 더 희망적인 것이 옳고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능력의 회복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는가? 우선 우리 스스로에게 이것부터 물어야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저런 잘못을 지은 것에 대해 슬퍼하는가? 유감스럽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이런 반복되는 패턴을 멀리하려는 갈망이 깊은가?' 또한 이것들도 질문해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나의 악습을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바라는가? 나는 주님의 시선처럼, 나 자신과 동료인간들을 사랑하길 원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울림이나 떨림이 있는지부터 살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울림이나 떨림의 강도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잘 살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로 가는 과정이고, 깊은 '인간애'로 나아가는 방향이며, 단순한 '죄와 벌'의 인과론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래서 주님의 회개는 '자유와 회복'을 가르치고자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점차 갈수록 각박하게 변해가고 합리주의적 인과론으로 더 치우쳐가는 이 세상에 인간애가 다시금 피어오를 수 있도록 우리라도 잃어버린 것을 '되살리도록' 합시다. 그것이 사순시기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카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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