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루카 9,28-36
루카 9,28-36
결혼을 하신 많은 분들 혹은 연애를 하는 많은 커플에게 이런 설문조사를 해봤다는 기사를 다들 접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배우자(남편, 부인) 혹은 애인이 미워졌던 때가 있었는지요? 만약 있었다면 언제였나요?" 이런 설문조사를 했더니, 부인들은 남편이 가장 미워질 때를 두고, 자기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랑 같은 편이 되어서 화를 내어주길 바라지만, 남편이 솔로몬왕이 되어서 부인의 잘못을 판단해줄 때에는 정말, 남편이 '남의 편'이라는 것을 절감한다고 많이들 답하셨습니다. 부인에게는 서로가 한마음이 되는 그런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거기서 감정의 괴리가 생기면 그 때가 가장 미운 때라고 합니다.
또한 남편들은 부인이 미워보일 때가 언제인가에 대해 답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다른 집의 남편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때라고 답하였습니다. 남자에게는 사회적인 자존감이 생명이기 때문에, 자신의 위신이 타인과의 비교로 인해 깎이는 것은 결단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는 연애하는 젊은 커플들에게도 동일한 양상을 보입니다. 여자친구들은 '오빠, 나 안사랑해?'가 최고의 무기가 되고, 남자친구들은 '나 안믿어?'로 유도합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소속감과 신뢰가 가장 두텁고 깨어지지 않을 때에 서로에 대한 사랑도 성장하게 됩니다. 그 반대로 그것의 상실체험을 하면, 그 때부터 여러 가지 의심이라는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됩니다. 상대편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고, 신뢰하지도 않게 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케이스가 누적되어서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관계의 상실인 이별로 향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이런 인간사와 완전 다른 세상의 논리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닮아있고 너무나 흡사한 관계입니다. 이는 아래의 히브리어 동사의 뜻을 통해서 너무나 잘 드러납니다.
"to get to know"=yada: יָדַע
히브리어 동사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사가 바로 저 '야다'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대상을 오감으로 접촉해서, 경험해본 후에 그 상대를 '알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적인 접촉도 내포하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대답에는 바로 그와 같은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믿는 백성을 두고 Nuptial Relationship이라고 표현합니다. 신혼여행을 간 커플이 첫날밤을 보낸 후에 서로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에 빗대어, 하느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을 잘 아신다는 것이고, 그만큼 깊이 개입하신다는 뜻이며, 언제나 우리의 편에 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성실하신 분이라는 점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호세야 예언서나 다른 곳에서도, 믿는 이들을 두고 자주 '여인' 혹은 '부인'으로 빗대어 표현하면서,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배우자(Spouse)로 표현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계약' 하에 놓인 백성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부활'로 그 계약이 영구히 갱신되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점을,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 인간성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신성을 산상에서 드러내보이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천상적 계시로 인해 그것이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서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 계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점을 우리가 '믿고 그분의 말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주님에게는 우리가 미워질 때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언제 우리가 갑자기 미워지실까요?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사랑을 간직하신 절대자 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만 보면 우리가 미워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더 안쓰럽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까요? 주님에게 우리가 미워질 때가 언제인가 물으면, 그 때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지 않을 때일 것입니다. 각종 합리화와 자만심, 조급함으로 인해 우리 마음만 돌보려고 하거나 여타의 악의 유혹을 물리치려는 용기를 보이지 않거나, 더 나아가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겠지'라고 체념하게 만드는 죄악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에, 주님의 눈에는 우리가 더 안쓰러우면서 동시에 미워질 것입니다.
'왜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느냐? 왜 나의 십자가 수난과 나의 피, 나의 땀의 위력을 너희는 믿지 않느냐? 너희의 체념보다 더욱 위대한 나의 능력과 희망이 있는데 너희는 어느 편에 서 있느냐? 너희를 혼란과 자만과 조급함 속에 안주하게 만드는 악의 유혹에 맞서기 위한 도움을 왜 구하지도 청하지도 않느냐? 대체 '너'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다시금 하느님의 아드님이 왜 인간이 되어서,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을 하시고 승천을 하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계약을 맺으셨는지, 왜 사순시기를 보내고, 왜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 그 근본에 대해 다시 깊이 성찰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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