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8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마태 7,7-12
마태 7,7-12
우리나라 말 가운데 '틀'이라는 한글자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면, 어떤 물건이 형성될 수 있도록 그 테두리나 근본이 되는 물건을 가지고 '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본틀'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하고, 반대로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 '틀'이 아주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떨까요? 이 '틀'이 필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틀'이 필요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답을 하실 것이라 여겨지는 게 바로 '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틀'에만 박혀서 있어서도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마태오 복음이 바로 그런 '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다이즘, 즉 유다인들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고 계약의 겨레라는 사고방식이 기성의 '틀'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 새로운 '틀'인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존의 히브리어 성경에 나온 율법(토라,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라는 그 '틀'을 새롭게 갱신하여 주십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은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조차 없었던 '주' 하느님을, 이제는 믿는 사람이 모두가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그런 획기적인 변화를 선사해 주셨습니다. 호칭과 인식의 '틀'도 새롭게 바꿔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무엇이든지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유다이즘의 주요 원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선벌악의 원칙입니다. 높은 곳에 앉아계시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거기 그 '틀'에다가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욱 더 좋은 것을 주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라는 점을 가미해서 새롭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저 '주 하느님'의 차원으로 머물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의 차원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게 됩니다. 바로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틀'로 새롭게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라고 권고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런 사고의 '틀'에만 갖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틀'을 선택하기 위해, 나의 사고의 '틀'을 놓을 수 있는 그런 결심을 갖고 있는가요? 마치 어린아이가 더 재미있고 더 좋은 장난감을 보면, 바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놓고 거기로 돌진하듯이, 우리들도 그처럼 '아버지 하느님'에게로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은 그저 멀리에 계시는 그런 '주' 하느님이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점을 깊게 되새겨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틀'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런 이후에 '청하고, 두드리고, 문을 두드려도' 더욱 더 좋은 것을 언제 어디서나 주실 '나'의 하느님이시란 점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타자인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이고 우리가 그것을 해드린다면, 반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겠습니까? 주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이런 신앙을 간직할 때에 신앙생활이 바로 감동의 드라마 그 자체가 될 수가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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