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늘의 복음묵상] 영리(營利)하게 살 것인가, 순리(順理)대로 살 것인가?

2016년 2월 14일 사순 제1주일

루카 4,1-13

독일의 문호인 괴테는 그가 쓴 비극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우스트(Faustus, '행운의' 라는 라틴어)라는 고전 독일소설의 주인공을 빌어서, 우리가 얼마나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는 박식한 지성인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는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라는 악마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은 악마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과 능력을 파우스트 박사에게 알려줄 것이니,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은 악마의 조정에 의해 움직이는 악마의 소유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파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괴테는 문학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인 도덕관념을 강하게 교육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지니는 욕망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 질 수가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지적 영리심(營利心) 때문에 영적으로 구속된 결과를 얻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이와 반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돌더라 빵이 되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주겠다는 유혹, 속세의 모든 권력과 권세를 다 넘겨주겠다는 유혹, 하느님 아들이라는 점이 드러나도록 몸을 던져서 아버지의 보호를 널리 알리라는 유혹 앞에서 주님은 진리인 성경말씀을 통해 그것을 물리치십니다. 빵만으로 살지 않는 인간이라고, 주 하느님만을 경외하라고, 그리고 주님을 결코 시험하지 말라는 진리로 그 영리한 사탄을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순리대로 사는 삶,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증언해주셨습니다.

육적인 유혹이든, 영적인 유혹이든 어느 유혹이 더 크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느 종류의 유혹이든 우리가 어느 길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에 대해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세례를 받은 이후에 광야에 나가셨기 때문에 자신이 메시아라는 점을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달하실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그런 점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여느 범인(凡人)이 지닌 동일한 조건 하에서 이런 유혹을 겪고 물리치셨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복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영리하게 살려고 하기 보다는 순리대로 살려고 애써야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동일한 인간으로 영리하게 사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한 길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영리하게 살기 위해서 파우스트 박사의 계약을 맺어야하는 경우들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리하게 살기 보다는 순리대로 살아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 더욱 좋다는 점을 깨닫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로 영리하게 살기 보다는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오늘의 의미를 살려주는 길이 됩니다. 

동시에 '말씀'과 '신앙'으로만이 사탄의 유혹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진리를 '신앙하고' 따름으로써 파우스티안 계약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말씀을 잘 이해하고 따를 필요도 있다는 점도 간접적으로 이 복음을 통해서나, 신앙체험을 통해서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철저히 '영리심'에 기반을 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 덕에 어쩌면 우리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 '영리심'이 극대화되면 될 수록 '이기심'이 극대화되고, 동시에 우리는 자유롭게 되기 보다는 노예가 되어 가는 길을 걷습니다. '욕망'이 있기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이 '욕망'을 섬기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분명 아니라는 진리를 역설적으로 깨닫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분명 주님의 말씀이나, 교회의 사회교리나 여러 가르침들을 생각해볼 때,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순리대로 살 것'을 교훈적으로 권고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8] 세례명 '소피아' (Sophia)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 제가 어린 시절에 문방구에 가서 물건을 살 때면, 항상 저보다 더 나이가 많았던 형들이 그 문방구에서 옆의 소피 마르소의 사진으로 코팅이 된 책받침을 많이 사가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미모가 출중하고 많은 이들의 여신으로 추앙받을 만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옆의 사진이 근래의 사진이라고 하며, 어린 시절의 전설의 사진들을 검색하여 보면, 지금 여느 아이돌을 능가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정말로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표기하면 Sophie Marceau가 됩니다. 프랑스어식 발음으로 '소퓌 마~르소'가 되겠구요. 특별히 그녀의 이름인 이 'Sophie'는 서양에서는 아주 많은 이름이고, 이것은 우리가 살펴볼 '소피아'의 프랑스어식 변형이라는 점을 알아두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이 이름은, 영어로는 Sophie라고 해서 불어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그리스어나 독일어에서는 Sophia라고 하며, 그리고 러시아어 등의 슬라브어 계열에서는 Sofia 혹은 Sonia(소냐)라고 합니다. 그래서 슬라브계열의 여성 이름들 가운데 소냐가 많은 경우가 있는데, 이 'Sonia(Sonya)', 즉 '소냐'라는 이름은 모두가 Sophia, 즉 소피아라는 이름의 변형이라는 점을 알아두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럼 이 소피아 혹은 소냐라는 이름이 지니는 뜻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이름은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Σοφια (Greek)라고 하는 여성명사에서 기원이 되었는데, '소피아'라고 읽고 그 뜻은 '지혜' (智慧,wisdom)입니다. 원래 이 소피아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던 단어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파르메니데스 등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이 그렇게 갈구하던 단어이고, 서로 저마다 자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9] 세례명 '율리오/율리아' 혹은 '율리안나 (율리아나)'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루카복음 20장 25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루카복음 20장 25절 말씀 형상화 "카이사라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이것은 바칠 것이 있다면 그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드리는'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당시 세금논쟁을 예수님과 벌이고자 하였던 로마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사실 그 카이사르의 것도 주님의 것이기는 하지만, 카이사르가 가져야할 몫을 부정하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도로 바치는 마음가짐이 요구된다는 점을 부각시킬 때에 많이 회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 공화정 시대에 실존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이 '카이사르'라는 말은 로마 시대의 통치자, 황제를 지칭하는 호칭이었기에, 그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 '율리우스(Julius)'라는 라틴어로 된 남성의 이름입니다.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은 바로 제우스 (Zeus) 신입니다. 그리고 로마신화로 넘어오면, 그 신은 바로 주피터 신(Jupiter)이 됩니다. 그래서 '율리우스(Julius)'라는 이름은 바로 이 신중의 신, 왕중의 왕인 주피터 신에게 자신을 봉헌한, 자신의 모든 것을 도로 바친 남성을 두고 '율리우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성의 이름을 바로 율리안나(율리아나, 쥴리엔, Julien)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신인 '주피터'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도로 바친 사람으로서, 로마공화정의 최고의 통치자로 역할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또한 반대로 '주피터' 신이 그를 통해 모든 권능을 부여한 사람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1] 세례명 '글라라'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요?

아씨시 성녀 글라라 대성당 지하에 모셔진 글라라 성녀 유해 앞에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의 영성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안에는 '자유'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글라라'입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성 글라라 봉쇄수도원의 창립자, 전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봉쇄수도원을 지칭하는 성 글라라 수도원의 최초의 영적 어머니, 이 글라라란 이름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그러했듯이, 글라라라는 이름도 라틴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12~13세기 중세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구약의 히브리어나 신약의 그리스어가 아닌 대중적인 라틴어로부터 이름을 따왔던 것입니다. 라틴어로 보면, 이 글라라는 철자가 Clara입니다. 이는 남성형용사 Clarus의 여성형입니다. 그래서 Clara입니다. 다시 이 형용사의 뜻을 살펴보면, 'transparent, clear"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라틴어 Clara가 스페인어로 와서는 그대로 Clara라고 표기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이 계란의 흰자 부분을 두고 'clara'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투명함이 백색으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태리어로는 Chiara (끼아라), 프랑스어로는 Clare (끌레르), 영어로 Clare (클레어)로 표기하고 발음합니다. 독일어로는 Klara라고 하고, 참고로 독일어에서는 '설명'이라는 명사가 Erklärung이라고 하여서, 상대를 두고 명료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설명'이라고 정의하는 독일어식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의 국문표준법상, 우리나라의 첫 음절은 ㅋ, ㅌ, ㅍ 등은 그보다 약한 소리인 ㄱ, ㄷ, ㅂ로 표기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클라라'가 되겠지만, 한국표준법에 따라서 '글라라'가 됩니다. 같은 경우로 Pet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