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3일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루카 5,27-32
루카 5,27-32
지금으로부터 2~3년전에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막걸리전문점 벽에 써있는 낙서 가운데 아주 인상이 깊은 글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로 연극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기도 하고, 또한 여러 인생들이 스쳐가는 그 문화적 아지트인 그 주점 벽에는 이런 시가 하나 낙서되어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만드신 신의 애프터 서비스는 용서다."
-시인 함민복-
그것을 보고 무릎을 팍! 쳤습니다. 어쩜 이리도 간명하게 모든 것을 촌철살인의 경지에서 표현하였을까? 그리고 이 시를 낙서로 남긴 이는 누구였길래, 이런 심정을 잘 이해하고 낙서를 남겼을까? 이런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한편에, 너무나도 깊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루카복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 그리고 그 불완전한 인간들이 저지르게 되는 반복적인 악습, 죄악 그래서 일탈과 중범죄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저 그 사람이 나쁘게 태어나서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영혼의 환자로, 주님을 영혼의 명의로 빗대어서 표현하면서, 그런 이들도 하느님의 '고객중심 애프터서비스'를 통해 다시금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회생가능성의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너무나 냉정하고 가혹합니다. 이런 용서라는 이상은 그저 종교시설물 내에서만 울려퍼지는 메아리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고객중심적'인지 '자기중심적'인지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손해를 보실 일도 없으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고객들인 '믿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죄, 정화와 보속이라는 '애프터서비스'를 펼치고 계시는데, 우리는 우선 그 고귀함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아직도 부족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서로 그것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의식도 부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의식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항상 기억합시다. 우리가 남을 나무랄 때에는 어느새 우리 자신이 '완전하신 하느님'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상대'를 나무라기 너무나 쉽습니다. 자신도 불완전한 존재란 점을 망각하면서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툼과 갈등이 너무나 만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미래'를 주목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은 주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의 삶은 주님의 은총에 맡기며, 미래의 삶은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 라는 격언도 존재합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이 '애프터 서비스'를 누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교우들에게 필요한 '애프터서비스 신고, 접수'를 대신 행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위와 같은 의식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여러 사람들을 위해 위의 정신을 얼만큼 표방하고 있을까요? 모두가 직급과 역할이 다를 뿐이지, 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하라고 교회는 사순시기에 다시금 주목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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