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루카 5,1-11
마지막으로 '따르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동사 ἀκολουθέω (아코뤼테오)가 있습니다. 이 동사가 '따르다'라는 뜻을 지닌 것인데, 두 부분으로 분할해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분석이 이렇습니다. 전자는 ἀκο(아코, 듣다)는 누군가의 말이나 소리에 귀기울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λουθέ로, 무엇인가를 놓다는 뜻의 동사 λυω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수동태라고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나의 오감과 영혼을 잡아당기는 그런 소리(말씀)를 듣고 난 후에, 지금 하던 것을 놓게 되는 상황'을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그것이 적용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밀당으로 인해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놓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공동체 소식, 주님의 가르침, 성경말씀, 다른 이의 대화 등등이 우선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하던 것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결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일부러 놓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좋은 것이기에, 그런 밀당을 하시기에 우리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놓게 되는' 경우가 하루에 얼마나 있는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들이 있고, 거기에 자유롭게 응하면 응할 수록 우리는 주님을 잘 '따르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밀당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시간들 가운데에서 얼마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루카 5,1-11
마태오, 마르코, 루카복음 이 세 복음서들을 일컬어 전문용어로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호칭이 사용되었는가 하면,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작가점 시점이 상호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위의 세 버전의 복음서의 한 부분을 읽을 때에, 다른 버전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이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병렬적 비교독서'라고 지칭할 수 있습니다.
이 병렬적 독서를 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배경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단독전승, 둘째, 이중전승, 셋째, 삼중전승입니다. 단독전승이란, 복음서 하나에만 등장하는 독자전인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이중전승이란, 두 복음에서 공히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삼중전승이란, 세 복음서 공히 등장하는 부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중전승부터는 따라서 두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욱 의미가 깊이 이해됩니다.
새성경을 보면 푸른색 Boldic(굵은 글씨)으로 각 에피소드의 제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목적인 배려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곁에 괄호 안에 다른 복음서의 이름과 구절이 나옵니다. 거기에 괄호가 없다면 단독전승, 하나만 존재하면 이중전승, 두 복음서가 추가가 되어 있다면 삼중전승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게 되는 이 루카복음서의 제자소명설화는 삼중전승에 해당됩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에 공히 동일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마태오와 마르코에는 단순히 사실적인 기록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인과적인 차원에서, 주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은 따라 나섰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유독 루카복음에서만 따라나서기 까지의 과정과 인물심리묘사, 주고 받은 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시몬과 예수님 간의 관계성이 생기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그런 이방인 그리스 사람들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 있도록 교육하기 위하여 이렇게 진술되었던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관계성이라는 단어인 relationship은 동사 relate로부터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동사는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사람의 어떤 특정한 측면(lato)을 자신을 향해 뒤로/거꾸로(re) 당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것이 된 후에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진술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연결이 된 상황을 두고 결국에는 관계성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베드로라는 사람의 어떤 측면에서 당겨서 이끌고 싶으셨을까요? 일단은 그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사실에서 비유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점에서도 더욱 더 시몬과 밀당을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교 배경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오직 절대자 하느님 앞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목격한 후에 그분이 절대자이심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겸손하고 단순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당기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밀당으로 인해 시몬과 안드레아 등등의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두고, 제자요 사도라는 새로운 자리에 기용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공동체 소식, 주님의 가르침, 성경말씀, 다른 이의 대화 등등이 우선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하던 것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결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일부러 놓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좋은 것이기에, 그런 밀당을 하시기에 우리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놓게 되는' 경우가 하루에 얼마나 있는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들이 있고, 거기에 자유롭게 응하면 응할 수록 우리는 주님을 잘 '따르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밀당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시간들 가운데에서 얼마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11)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