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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기쁨이라는 지평선(Horizon)을 향해서

2016년 1월 9일 토요일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가 쓴 비극 가운데 아주 유명한 것이 아시다시피 <햄릿>입니다. 덴마크의 햄릿 왕의 아들인 햄릿 왕자가, 자기의 숙부인 클로디어스와 어머니 겔투르드, 그리고 자신의 애인 오필리어와 애인의 아버지이자 신하인 플로니어스, 그리고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자신과 마지막에 검투를 치룬 레어티즈... 이들 사이에서 햄릿 왕자는 인간이 가진 여러 탐욕과 모순, 살인과 각종 죄악들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존재인지 고뇌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런 유명한 대사를 남기게 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인생에서 여타의 다른 즐거운 감정이나 측면들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햄릿 왕자는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인간군상의 표본으로 대표됩니다. 그래서 햄릿 자신도 마지막에 레어티즈와의 검투 후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감히 추정해봅니다만, 작가인 세익스피어는 이런 비극을 인간존재를 비추는 거울로 삼고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독일에서 태어난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의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이분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본주의적 공동체 건설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닌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소외와 고통들, 그것들을 뛰어넘고자 노력할 때에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인본주의적 사회공동체의 건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고뇌와 고통 이상의 '이상'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우리의 존재(Being)에 대해 집중합니다. 그래서 소유에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기쁨이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심리적 심연의 구조를 프로이드 이론에 기반해서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해방의 차원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제 신학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는 '진리'를 정의할 때에 고전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접근합니다. '진리란 판단과 사물의 일치'라고 합니다. 즉, 쉽게 설명해서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였던 것이 실제로 내 오감 앞에 등장하여서 관찰할 때 그것이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줄 때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형의 남녀가 있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내 눈 앞에 등장할 때 우리는 전율하면서 그 사람과의 결혼과 미래까지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이상'이고 내게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진리는 놀라운 '발견'이고 소름 돋는 '기쁨'입니다.

모든 것에는 그것만의 지평(horizon)이 있다고 합니다. 지평이란 그것이 가지는 윤곽, 외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평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 지평을 넘거나 또 다른 지평선을 향해서 걸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생이 생동하니까(Dynamic) 인생이겠지요. 햄릿 왕자가 대표적으로 겪은 것도 인간 고뇌라는 지평입니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인본주의적 공동체 건설도 우리의 한 지평입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한 진리의 지평도 동시에 우리 삶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느 지평선을 향해서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한스 가다머라는 철학자가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해에, 과거의 모든 지평들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해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오늘날의 새로운 경험과 인식으로 인해 재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러분들 인생 이해의 지평은 늘 접하게 되는 성경 말씀을 통해 융합되고 있는지요? 또한 그 지평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지요? 그리고 그것이 신앙이 이야기하는 존재하는 '기쁨'을 향해, 지평융합을 전개하고 있는지요? 새롭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어서 생동하는(Dynamic) 인생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향해야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기쁨이라는 지평선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인간 존재와 공동체적 소명의 관점에서 요한 세례자의 말씀을 통해서 잘 새겨보도록 합시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요한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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