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
그리스도교를 설명할 때 항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유다이즘입니다. 이 유다이즘이라는 것은, 바로 '야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유다인들 (지금은 순수 이스라엘 혈통의 사람들)을 선택하셨으며, 그들에게 토라(계명의 법)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이즘은 창조사상, 선민사상, 율법중심주의와 내세적인 구원관을 믿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유다인과 비유다인으로 구별하게 됩니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이유로 인해 차별하게 됩니다. 그 실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지역 국가들과의 갈등입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신념인 유다이즘을 고수하면서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회당(시나고가)에 모여서 매주 토라(모세오경)를 봉독하면서 종교적인 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맥락을 뒤집으려고 노력하십니
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명하시는 사렙타의 과부와 나아만 장군은 그 실례가 됩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사렙다"의 과부와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 모두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순종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음을 중심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그 믿음이 미치는 은총에는 민족적인 '예외'가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하셨습니다. 루카복음에서 기술된 주님 말씀의 뜻은, 결국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복음이라는 뜻을 다시금 확증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아웃사이더'를 위해 오셨습니다. 기존의 정치, 사회, 이념적인 고정관념에 의해 배제된 그런 '아웃사이더'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들도 동일한 인간이고, 그들도 동시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더욱이 어떤 배경과 선입견 없이 그들을 봐야한다는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고향과 배경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언사가 마음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백그라운드에 누가 있고 어느 누구의 아들이며, 어떻게 자라왔는지에 대해서 더욱 더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의 혜택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또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파할 때에, 예수님처럼 어떠한 선입견 없이 바라보도록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 특별하게 배제되고 있는 '아웃사이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고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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