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9일 화요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 2,23-28
마르 2,23-28
우리가 종종 듣게되는 사자성어 가운데 '대도무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연걸이 출연한 영화 제목으로도 알려져있고, 돌아가신 故 김영삼 대통령이 주로 일필휘지로 정치인들에게 선물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원래의 뜻을 찾아보니 이러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 (10~13세기경)에 있었던 승려 혜개가 자신이 깨달은 수행의 이치에 대해 기록한 문구입니다. 직역하면 '큰 길에는 문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큰 '道'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막힐 것도, 막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면 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길에는 문은 없지만 그 문은 어느 길로도 통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통하게 되면 천하에 홀로라도 거리낄 것이 없이 지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길',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제시하는 '방도'에는 특별한 '조건'이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거대한 진리가 되고,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 때문에, 이 또한 큰 '道'가 됩니다.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정을 내세우면서, 왜 금지된 행위를 하게 놔두냐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래부터 제시한 '큰 길'을 재확인하여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 2,27)
그렇습니다. 더 큰 길, 더 큰 진리, 더 넓은 방향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사소한 조건들이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메시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본래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은채, '조건만' 추구하는 방식에 익숙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조건'에 집중하기 보다는 '인간'에 집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여러 고민이 생길 적에,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우선순위를 결정하지 못할 적에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고자 하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항상 '인간' 그리고 '생명'이 우리의 최우선순위에 올라 있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부터 시작하면, 우리는 '복음의 길'을 통해서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의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는 어디든지 당도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내고 가면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마르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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