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월요일
마르 2,18-22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전문용어 가운데 '패러다임' (paradigm)이 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정설이라고 믿고 있던 이론에 대항하는 예외들이 제시되면서,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어서 그것이 새로운 정설이 되는 상황을 두고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이 용어는 그 자체로 어떤 뜻을 지니고 있길래, 이렇게 사용되는 것일까요? 수많은 용어들이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듯, 이 용어 역시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παραδείκνυμι (paradeiknumi), "exhibit, represent, expose"의 명사형입니다.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분할해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앞에 위치한 παρά (para), "beside, beyond" 그리고 이어지는 동사 δείκνυμι (deiknumi), "to show, to point out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 '(누구의) 곁에서 (새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
- '(누군가 생각하는 바) 이면에 놓인 새로운 가치를 지시하는 것'.
그래서 복음은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계명 중심의 유대교 신앙에 충실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의 곁에서 새 가르침을 제시하시고, 또한 자신들이 믿어왔던 계명들의 이면에 놓인 새로운 가치를 지시하셨습니다.
기존에 유대교에서 믿고 있었던 정설에서 '단식(斷食)'은, 유대교 명절 가운데 하나인 '욤 키푸르(Yom Kippur, 히브리어로 '속죄의 날, 속량절')에 의무로 해야 합니다. 이 속량절은 보통 새해 첫달에 맞이하는 명절로, 작년에 지었던 죄를 새해에 용서받는 마지막 기회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단식은 용서를 받기 위한 '사전 필요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식을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용서를 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기 위하여 그리 행하였습니다.
이런 개념의 연장선 상에서, 현재도 하고 있는 이슬람의 라마단,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단식을 중시합니다. 실제로 몸과 마음의 쉼과 정화를 위해서도 그 기능을 충실히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것만을 보고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용서'가 '조건적 계명'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지시합니다. 그러면서 '잔치'로 비유된 주님과 함께 머무는 '생활'을 '단식을 통한 용서'보다 우선시합니다. 그리하여 기존의 정설인 '계명의 준수'보다 '함께 머무름'에 대해 우선해서 강조하시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그래서 새로운 '지평' 혹은 '시각'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본질'을 배우길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 삶의 '진리'가 되길 간청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우리의 '일상'이 일치하기 시작하면, 그 말씀이나 가르침을 두고 신학에서는 '진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패러다임'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복음이라는 '패러다임'을 우리 삶의 '패러다임'으로 수용한 채로, 개인과 사회 공동체에 그것을 적용하면서 사고하는지 성찰하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런 요청에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얼마나 복음이라는 '패러다임'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복음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인생길'이 탄생하였습니다.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John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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