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요한 2,1-12
요한 2,1-12
오늘 들은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적사화입니다. 항상 기적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또한, 예수님도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가나안의 혼인잔치 기적사화를 해석할 때에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장 3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니, 4절에 예수님께서 '여인'이라고 호칭합니다. 5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기적이 성사되었다'라고 해석합니다. '어머니'께서 '여인'이라는 수모가 될 수도 있는 호칭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감내하셨기 때문에 기적이 이뤄졌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마리아의 공덕을 칭송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칭송하고 공경하는 자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대단히 권장되고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마리아를 성모, 즉 거룩한 어머니로 칭송하고 공경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 가나안의 잔치에서 등장하는 두 호칭, '어머니'와 '여인'이라는 호칭을 '모순'이라는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그래도 '어머니'가 원래의 지위이시기에 거기에 입각해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의 뜻을 보고 해석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기적은 어머니의 전구와 간청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서 예수님 자신을 증언해준 근거로 남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말씀(2,5)이 결정적인 역할이나 공헌을 했다고 해석하는 성경해석은 정확하지 않은 해석이고, 다소 성모신심 중심주의에 입각한 해석입니다.
그리스어 어감에서 '어머니'라고 부르면 당연히 자신의 애정이 담긴 '어머니'입니다. 반면 '여인'이라고 부르면, 어떤 주관적인 감정을 개입시킨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공적인 차원에서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이 냉혹하거나 배은망덕한 아들이라는 차원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요?
이렇게 달라집니다. 예수님 자신도 공사구분을 확실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객관화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런 사적인 것보다 하느님 아버지가 부여하신 '공적인 사명'이 훨씬, 항상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의 '자유의지'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런 후에 일꾼들에게 귀뜸은 해놓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시오.'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시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이 깊은 오늘의 복음에서 배우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지상구현에 이바지하는 공적인 사명을, 사적인 이익추구보다 항상 더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구현은 하느님이 중시하시는 가치가 이 땅에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가치란 서로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우리의 생명과 그런 가치를 알려주신 주님을 '함께' 찬미하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실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려움과 반대가 등장하고 실망하게 되더라도, '어머니'와 '여인'이라는 모순에 직면하시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어머니'를 기억하고 위로와 용기를 달라고 간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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