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바실리오 |
그런 점에서 요즘처럼 시끄럽기 그지없는 시기에 다시금 올바르게 신앙을 해석하고 가르쳤던 위대한 성인을 떠올릴 필요가 더욱더 절실합니다. 특별히 이단사이비에 맞서 정통의 가르침을 알리려고 했던 '성 대 바실리오'(St. Basil the Great, 330-379)를 다시금 기억하고 그분의 영성을 다시 배워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분의 이름인 바실리오가 지니는 어원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시다. 바실리오 혹은 바실리우스(Basilius)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βασιλευς (basileu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리스어로 '바실레우스'라는 것은 그 뜻이 'King', 곧 '왕, 임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실리오' 혹은 '바실리우스'라는 이름 안에는 '왕이요 임금으로 다스리는 남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리스어 원문에서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엘떼토 헤 바실레이아 수, '당신의 나라가 이곳에 임하시며')·' (마태 6,10)라고 하는데, 이 '나라, 왕국'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왕이 계신 곳, 왕이 다스리시는 곳'을 의미하며,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바실리오'라는 이름 안에 숨어있는 '임금'이라는 뜻, 그리고 더 확장해서 생각할 때 그런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바실리오 성인은 364년에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그를 이어 370년에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Caesarea) 주교가 되었습니다. 대 바실리오 성인은 그의 말과 글로써 특히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싸웠습니다. 아리우스 이단이란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관구의 사제 아리우스가 '성부'의 본성과 '성자'의 본성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이질본성론'(Heterousios)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만든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분의 '독생성자설'을 부정하였기에,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삼위일체설도 부인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독생성자설도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아들'이라는 호칭도 비유적이고, 성부에 종속되는 성자이며 성자에게 종속되는 성령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무로부터의 첫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무로부터 창조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삼위일체의 '동일본성론'(Homoousion)을 부정하였고, 지금도 그와 같은 맥락을 하는 이단이 대표적으로 '여호와의 증인' 등입니다.
이렇게 아리우스 이단이 교회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삼위일체 동일본성론을 대놓고 부정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이 때에 대 바실리오 성인은 자신만의 '성령론'을 집필하였고, 이것이 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령론'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오늘날의 이단사이비가 여전히 근간으로 써먹는 '영지주의(Gnoticism)'가 유행이었습니다. 곧, '영적인 것은 거룩하고 육적인 것은 사치요 쓰레기다'라는 절대분리의 이분법적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켰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럴 것이 육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너무 지치고 힘들기 때문에, 하나의 탈출구로 삼고 싶은 것이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육적인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미혹의 목소리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이 아니면 이렇게 사랑을 받을 곳이 없을 터인데'라는 유대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분리주의적 사고를 다시금 통합적인 사고로 복원시켜주시는 분이 성령 하느님이시라고 담대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그의 저서 "성령론"에서 "성령은 생명의 힘을 부여하여 우리 영혼들을 죄의 죽음으로부터 그 영혼이 한때 누렸던 생명으로 되돌려 줍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믿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개신교에서는 이런 성령 하느님을 '보혜사'(保惠師,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신자를 보호하여 돕는다'는 뜻을 지니는 한자어라서 그렇습니다. 많은 이단사이비 교주들이 자신을 두고 이 '보혜사 성령'이라고 자칭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이단사이비 교주들은 각각의 신자가 자신의 삶에 충실하도록 돕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왕국 건설에 혈안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는 영혼의 사기를 일삼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거짓이나 온갖 악행을 자신의 조직을 위해서는 저질러도 좋다는 정당화의 논리로 사람들은 어지럽게 만들고, 결국 최근에 목격하듯이 반사회적인 행태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마녀사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실리오 성인은 올바른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결코 굽히지 않고 자신의 말과 글로 펼치셨습니다. 또한 베네딕토 성인이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면, 바실리오 성인은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베네딕토 성인도 바실리오 성인의 형제애 중심적인 수도규칙에 많은 영감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계명을 위해 그는 여러 요양원과 양로원, 가난한 이들을 돕는 기관을 조직하고 세우는 데에 아주 열정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약자들을 괴롭히는 지역의 영주나 황제에도 과감히 맞서면서 그들의 진정한 보호자, 대변인으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과연 참된 성령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종으로 활약한 주교였습니다. 참된 왕이신 성부 하느님의 종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성자께서 교회에 명하신 '세우는'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단사이비들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여념이 없는 반면에 그는 있는 것들을 더욱더 의미충만하게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365개의 편지글을 남겼고, 무엇보다 역대급인 '성령론'을 통해 영원하신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이 구원경륜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확언하였습니다. 내재적으로는 삼위일체로 사랑의 유대를 끊임없이 교환하시면서, 그것이 성자의 육화를 통해 이제는 발출하는 끊임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삶과 일상을 무한대로 새롭게 세우시는 분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는 위대한 바실리오 성인입니다.
이단사이비도 일종의 '중독'이라고 합니다. 일명 '종교중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심리는 '도박중독'의 심리와 유사하다고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한 방에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겠지?'라는 기대심리로 인하여 모든 것을 올인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가 아직도 많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최근의 사태를 보더라도 그런 의심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자의 '육화'와 '수난'을 더욱더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룩함을 생각할 때에 흔히 하는 착각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바로 거룩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이 세상에 더욱더 참여하여 우리를 충만히 채워주시려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평범함 속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깃드는 것을 두고 진정한 거룩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상의 신비에 확실하게 열려있던 성인이 바실리오 성인이었고, 따라서 일상 속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다스림을 누구보다 더 확신하였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스리심을 믿고 당당할 수 있었고, 이단사이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자기 개인 안에만 그렇게 사랑의 내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공동체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관대하고 형제들에게 열려 있으면서, 언제나 자신의 도움과 재능 등을 가난한 사람부터 그의 수도공동체 형제들에게까지 나누었기에, 그런 그의 위대한 도량을 칭송하며 "대"(the Great)를 꼭 첨가해서 그를 형용합니다. 과연 지극히 높으시고 사랑이 한없으신 하느님의 현존으로 인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상의 교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워준 위대한 성인이 바로 "대 바실리오"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바실리오"라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쓰는 이들은, 항상 하느님의 위대하고 한없는 사랑을 감지하고 있어야 하며, 그 사랑에 참여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을 나누는 일에 아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당하고 담대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이단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이단에 빠지게 되는 이들이 갖는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채워주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대는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주님께 대한 신뢰 없이 그분께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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