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되돌아보면, 항상 유명한 사람의 그늘 아래에 가려져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의 관심도가 낮아지면 더욱 더 그러합니다. 얼마전에 우리가 지낸 8월 15일 광복절을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생존해 계시지만, 우리들은 그분들의 공로며 그분들의 존재 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금 되새기고 그분들의 공로에 대해 감사하는 기회가 많이 되살아나야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재평가하고 상기해야 하는 순간들이 늘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인물, 지명 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관심도 낮아질 수 있으며, 아무도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 채로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고, 재평가해보면서 상기해야하는 순간들이 늘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런 성경시리즈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구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12지파 가운데 막내 "벤야민" 지파가 전체 성경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재평가해보고, 상기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벤야민 지파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봐도 그렇고, 또한 사도 바오로도 자신이 이 "벤야민 지파"의 후손이라는 점을 공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맥락이라는 점에서, 이 "벤야민" 지파에 대해 재평가하고 상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차원에서 이 벤야민 지파가 중요한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정착지 분포 |
위에 나와있는 지도를 보면 사해를 기준으로 좌측 상단에 위치한 주황색 표시가 된 지역이 보입니다. 거기에 예루살렘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인접해서 남쪽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것이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유다라는 명칭이 지니는 뜻)에서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북쪽의 사막성 기후에 황량한 지역에 자리잡은 다른 지파들보다, 요르단강을 인접하면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예루살렘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벤야민 지파는 아주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내포한 그 이름이 바로 '벤야민'입니다. '벤야민' 혹은 '베냐민'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원래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로 בִּנְיָמִין이라고 합니다. 쓰여진 대로 발음하면 '빈/야민'이 됩니다. 이는 두 개의 단어로 분리할 수 있는 합성어인데, 앞의 '빈'은 원래 '아들'을 뜻하는 '벤 (בֵּן)'이라는 단어와 '남쪽'이라는 뜻을 지니는 명사 יָמִין '야민'이라는 두 개의 명사가 합성되어서 '벤야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해석하면 '남쪽 지방의 후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예루살렘이란 심장부가 위치한 지역에서 나온 후손이기 때문에 '올바른 지역에서 태어난 후손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벤야민을 라틴알파벳으로 바꾸면 많은 유럽어에서 '벤야민'으로 발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Benjamin' (벤자민)으로 발음하게 되는데, 유럽언어들에서 J(제이)는 그리스어 Y(입실론)의 후예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그 소리를 '이' (i)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현대 주요 유럽어들에서는 '벤야민'으로 여전히 발음하고 표기하겠지만, 영어에서만은 '벤자민'으로 표기하고 발음한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발견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히브리어 '야민'(Yamin)과 유사하게 아랍에서도 남쪽을 '예멘' Yemen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 이름이 '예멘'이 되는 이유가 이 히브리어 '야민'과 유사한 어근을 지니는 아랍어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6절부터 20절까지에 보면 벤야민의 탄생이야기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베델을 떠나가는 도중, 에브랏까지는 아직 얼마 더 가야 하는 데서 라헬이 몸을 풀게 되었다. 난산이었다. 아기를 낳지 못해 고생하는데 산파가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아들입니다." 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라헬은 죽게 되어 숨을 거두면서 아기 이름을 벤오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기 아버지는 베냐민이라 불렀다. 라헬은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다." (창세 35,16-20, 공동번역 구약성서)
여기서 보시다시피, 베냐민(벤야민)은 아기 아버지인 야곱(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사악의 아들)의 둘째 아들로, 길을 가는 길에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라헬은 자신이 죽기 전에 아기 이름을 '벤-오니' בֵּן־עֳנִי라고 이름을 짓게 됩니다. 이는 히브리어 명사 '오니' (עֳנִי)가 'misery, pain, affliction', 즉, '슬픔, 고통'이라는 부정적인 뜻을 지니는 것입니다. 라헬이 자신이 산고를 겪고 죽으면서까지 출산한 아이의 이름을 '나의 슬픔과 고통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뜻에서, '벤-오니'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후에 아이의 아버지인 야곱이 긍정적인 뜻에서 '베냐민(벤야민)'으로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야훼 하느님의 약속을 그도 믿었을 것이기에, 자신의 생모는 부정적인 이름을 남겼지만, 약속의 성취를 믿는 그로서는 아이의 이름을 '행운으로 낳은 아이, 올바른 곳에서 나온 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되는 그런 희망의 비전이 이 이름 하나에서도 도출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베냐민'이라는 지파가 정착하게 된 스토리는 여호수아 2장에서 6장까지에 묘사된, 전반적인 지파들의 정착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흥미로우시면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세 이후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거룩한 천막'이 위치한 곳이 바로 이 벤야민 지파와 에프라임 지파의 경계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호수아 4~5장 참조) 후에 다른 지파들과의 전투들로 인해 벤야민 지파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판관기 19~21장 참조) 이후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이렇게 양분되게 됩니다. 솔로몬 시대까지는 거대한 한 나라로 잘 이뤄져 있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금 분할되게 됩니다.
이 남북체제로 분할된 가운데 최전방에 위치한 지역이 바로 베냐민 지파의 지역이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통할해서 남 유다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북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 유배로 인해 폐망하였을 때에도 베냐민 지역은 여전히 유다지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후에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키야가, 침략자인 '아시리아(바빌로니아)'에 무력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시 나이가 21세로 즉위했기 때문입니다. (2열왕 24,18 참조) 그런 그에 반해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왕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을 하는 핵심적인 장소가 바로 '베냐민' 지역이 됩니다. (예레 32장 8절 참조) 마치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이 과거 우리 나라의 항일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던 장소라는 점과 동일합니다. 마치 대구 동성로의 국채보상운동공원이 있는 것처럼, 베냐민 지파는 과거에는 중요한 지역에 불과한 명칭이었지만, 가면 갈 수록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중요한 '저항과 각성'의 장소,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소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나서도, 유다와 베냐민을 통칭하여서 '유다 지역'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유배를 경험한 지역과 경험하지 않은 지역으로 양분되면서, 전자는 유다인들로, 후자는 '사마리아인들'로 양분되어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에즈라 4장 참조) 후에 로마의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이 유다와 베냐민 지역이 모두 '유다이아' (Youdaia)로 호칭이 되었고, 계속해서 로마 시절에도 베냐민 지역에 대한 가치는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과 저항성이 담긴, 희망과 용기라는 이름을 지닌 지역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 또한 자신이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묻습니다. 혹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예 저버리신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사실 나만 해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에 속합니다."
(로마 11,1; 200주년 신약성서)
"나는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히브리족에서 나온 히브리 사람, 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 (필리피 3,5; 200주년 신약성서)
이렇게 자신이 이스라엘의 전통에 충실한, 진정한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런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접하고 난 후에 변모되어서, 이제는 베냐민이라는 말의 뜻을 그리스도화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곳에서 태어난, 좋은 아들'이라는 이름이 '그리스도를 위해 올바르게 행동한, 훌륭한 사도요 좋은 아들'이라는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갖은 박해와 불의에 항거하는 의미도 역사적으로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흔히들 종교는 그저 '거룩한 것'만 얌전히 취급하면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공부해보고, 여러 가지로 비판적으로 해석해보면, 종교의 본 정신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처음에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태어난 아들, 즉 '벤오니'였으나, 하느님과 함께 움직이면서 희망을 향해 '용기있게' 나아가는 삶을 믿었던 아버지 야곱의 믿음으로 인해, 그는 '베냐민'이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래도 목적이 분명한 저항과 정통성의 보루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도 바오로의 정신으로 이어지면서, 그리스도교에도 그 명맥이 연속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종교는 세상 안에 자리하고 있고, 지구촌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구 밖의 어느 우주 한켠에 성전을 짓고 하느님을 찬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 지상에서는 누구와 함께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거기에 헌신한 수도자와 성직자들의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세상에 사는 '우리들의 올림픽'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베냐민(벤야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또한 역사를 알면서 재평가하고 그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귀중하다는 점도 함께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독립운동가)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