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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9의 게시물 표시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12] 불의(injustice)

사순 제2주간 월요일(다해) 오늘 우리는 '불의'에 대해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의'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반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요? 일단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의 정의(Justice)를 제1독서 다니엘서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니 9,4-5) 이렇게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맺어진 쌍방준수의무의 당신 계약과 그에 수반하는 계명들을 우리가 지키지 않는 것을 두고 '불의'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지키는 것을 두고 '정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구약 전반에도 그러하고,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적 심판론이 강력한 성경에서도 나오듯이, 하느님께서는 전통적으로 '상선벌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른 신들처럼 인간을 대상으로 '상선벌악'만 챙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시고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 (시편 79,9).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를 베푸실 때, 그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빛나십니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이 점을 높이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불의'와 '정의'가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선벌악적인 하느님만 강조하고, 불의와 정의만 강조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타동적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에 조건이 많이 달리고, 주석이 많이 달린다면, 우리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58] 세례명 '도로테아'는 무슨 뜻을 지니는 것일까요?

미국 가톨릭 평화주의자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께서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언제나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습니다."  <1978 세계성체대회> 미국 중산층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던 이 담대한 여성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노동운동과 반전운동 등에 헌신한 여성입니다. 그녀의 그 작은 울림이 현재까지도 크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그녀가 꿈꾸던 형제적 공동체가 복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 왜 이렇게 그녀는 담대한 꿈을 꾸었을까요? 어디에서부터 그녀의 이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녀의 이름에 주목해 봅니다. 도로시, 그 이름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요? 도로시라는 이름은 원래 그리스어  Δωροθεος (Dorotheos, 도로테오스), 그 뜻은 "하느님의 선물(gift of God)"이고, 선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명사 '도론'  δωρον (doron) "gift", 그리고 하느님을 뜻하는 남성명사 테오스  θεος (theos) "god"가 합쳐진 합성명사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면 테오도로Theodore인데, 이 역시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하여 둘 다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 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도로시는 이 도로테오스(Dorotheos)의 여성형을 영어식 표기로 변환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도로테아(Dorothea)라는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된다는 것은 어떤 영성적 의미가 있을까요? 일단은, 그녀가 받은 은사가 세상사람들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과연 인간적인 교육과 발달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누가 하느님의 선물이 100% 맞다고 하겠습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11] 변모

사순 제2주일(다해) 그리스도의 변모(두치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약속을 주십니다. 계약을 주시는 것이며, 그 계약의 규모도 몇억 몇십억 빌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땅 전체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큰 감격이었겠습니까? 우리는 놀라우신 하느님의 생각에 경탄할 뿐입니다. 동시에 언제나 구원사 속에서 신실하신 당신의 모습을 펼쳐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하시고 지키시는 방법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이사야서 55,8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사상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과연 하느님 생각의 깊이는 인간 생각의 깊이와 천지차이이며, 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하느님 경외라는 엘로힘계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처럼 자녀나 약속의 보증을 한동안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2독서는 자기변모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분으로부터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는 물어봐야 합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기도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하는 것이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하느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속좁은 내가 더욱 더 개방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느님과 더 깊은 유대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지, 상대가 변화되도록 촉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나의 관점을 변화시키고, 나의 자세를 변화시켜, 내가 왜 하느님과 일치를, 내가 왜 형제자매들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나라는 자아의 몰골을 관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일상관상이 기도의 목적이요 근본이라는 점도 바오로 사도는 아울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거룩한 변모에 대한 복음입니다. 미리 부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7] 표징(Sign)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에서 요나 예언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요나 예언자가 활동할 무렵은 기원전 8세기 무렵이며, 이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이웃 강대국인 아시리아제국(Assyrian Empire)이 정치적, 종교사회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니느웨 혹은 니네베(Nineveh)는 그 아시리아제국이 수도로 삼은 도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제국의 심장부에 해당되는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시리아 제국에서 아주 큰 도시로서,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요나 3,3) 거대한 성읍입니다. 이런 성읍에 '요나'라는 이름을 받은 예언자가 파견되는 것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나' יוֹנָה Yonah는 그 뜻이 "Dove"(비둘기)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대개 모든 이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함을 의미하고, 또한 희생제물로서도 아주 저렴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속죄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발에 묶어서 보내기 때문에, 좋은 메신저라는 표징(Sign)이 됩니다. 그리고 그 화답의 편지를 묶어서 다시 되돌려보내면 주인에게 돌아가는 비둘기로 묘사됩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축복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므로, 그 반대의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파견되는 메신저로 비둘기가 표징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의 메신저, 비둘기 '요나' 예언자는 그러나 아주 담대한 예언을 합니다. '사십일 후에 니네베 성읍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려는 표징의 차원에서 사십일이라는 숫자가 사용된 것이지, 실제로 40일이라는 시한적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니네베 사람들은 실제로 말의 이면을 알아듣고 바로 야훼 하느님께로 회심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은 그렇게 우리에게 분명한 진리를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6] 말씀(Logos)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우리는 계산을 하기 위하여 계산기를 사용합니다. 아주 정확하게 빠르게 수치를 정리하기 위해서 입니다.복잡하던 계산이 계산기로 하여금 아주 정확하고 간결하며 명료하게 드러나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복잡한 연산과 작업을 처리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발명했습니다. 이제는 더 복잡 다양한 일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합연산보다 더 얽힌 인생사는 무엇으로 그것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Logos)입니다. 그리스적 철학에서는 Logos(로고스)는 그 성격상 인간의 이성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 이성은 본성상 오류를 싫어하고 진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뭐든지 따져보고 비교해봐서 연속성이 담보된 진리를 발견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적용하도록 의지에게 소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 우리가 인생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 더 복잡한 문제들 가운데 놓여있을 때,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지도 모르고 있을 때, 그 때에 우리의 방향을 연산해주는 길이 바로 말씀(Logos)라는 것이며, 더욱이 이 말씀이 직접 사람이 되셨다는 점이 거룩한 성탄입니다. 이 성탄으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단순히 곁에서 계산을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서서, 더욱 근본적으로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악을 당신의 직접 수난을 통해서 해소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근원적 해소 덕택에, 결코 영원한 좌절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을 듣고, 읽고, 보고, 믿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간결하게 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이 약입니다.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5] 선택

사순 제1주일(다해)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탁월한 선택을 통해서 흐뭇한 결과를 맛보며 기뻐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 쓰라린 상실을 맛보며 슬퍼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실수를 최소화하고 미래를 예측해보려는 지성의 통제력과 상상력을 빌어 올바른 선택을 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 선택과 관련하여 어떤 필요를 충족시켜줄까요? 그것은 바로 나로서는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하느님과 신앙의 선조들은 이미 가본 길, 이미 아는 길을 친절하게 인격적으로 소개해주고 계시기에, 만약 우리의 자유를 위한 선택을 할 의지만 충만하다면, 의외로 선택이 기준점이 명료해 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기준점에 대해 오늘의 말씀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6장에서는 먼저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가치를 '역사인식'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시합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떠도는 아람인들이었고, 이집트에서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그래서 저희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희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저희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신명 26,7)라는 말씀대로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청원, 그리고 미래의 기쁜 해방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 역사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연속성'이 보장이 되는 것을 우선 선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우리의 선택이 항상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우선해야 한다는 점도 상기시켜 줍니다. 아무리 처음에 최선을 선택하였다고 하더라도, 유한한 이 현세의 특성상 나의 선택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고통스럽고 쓰라린 결과나 오해를 맛볼 수 있는 냉혹한 현실이 받아들여야할 현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4] 자비(Mercy)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자비(Mercy)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깊이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있게 살펴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과연 자비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 깊이를 이해하였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하느님이 말씀하신 자비가 일면 비슷하면서도, 또 일면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자인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의 뜻은 이렇습니다. 현자인 부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인간 욕망 속에 있는 집착이며, 이를 수덕으로 끊어버리고, 진리의 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순환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자비심은 그 어떤 집착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순백의 사랑으로 이 오욕칠정에 사로잡혀서 허우적대는 중생들을 구해내는 것이 자비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가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죄악의 굴레 속에 있는 인간을 구하고자 직접 죄악의 굴레 속으로 뛰어드시는 모습이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살짝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보기 좋게 창조하셨다는 하느님의 선(Bonus)을 대전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너스로 인해서 우리가 비록 죄악의 굴레에 갖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현상황이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영어단어 Mercy의 어원을 보면, 월급, 보수, 상품을 뜻하는 Mercedem이라는 라틴어 단어의 소유격 Merce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 뜻은 'reward, wage, pay' 등의 뜻입니다. 그리하여 보상과 댓가라는 의미도 함께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하심과 우리의 한계를 서로 교환하는 차원이 바로 자비이며,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의 나약함을 서로 견주어 보았을 때에 더 나은 길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3] 통회

재의 수요일 다음 금요일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시편 51,17) 오늘의 말씀에서는 단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서 58장은 단식에 관한 예언 가운데 아주 의미가 깊고 중요해서 자주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과거에는 단식이 그저 자신들이 야훼 하느님의 계약으로 선택된 백성임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리 하였습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이사 58,3) 그러다보니 자동적으로 DNA로 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사람도 아닌 대접을 받았습니다. 완전히 이방인이요 낯선 이로 냉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 58장에 이르러서는, 단식이 그저 하느님 백성임을 자랑하기 위한 표시가 아니라, 누구든지 하느님께 대한 통회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 조차도 단식을 해야 하였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이제는 이방인도 낯선 이도 야훼 하느님께 대한 단일한 신앙 속에서, 더욱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 전에는 단식 자체가 뽐내기 위한, 자랑하기 위한 목표가 되었다면, 그 목표는 이제 상대화가 되고, 되려 자선을 이루기 위해 자비심과 통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차원에서 단식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같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2] 불안

우리 인간 마음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럼 왜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일을 모른다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안'(Anxiety)이고, 이 불안함 때문에 스트레스가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른다는 그 불안함 때문에 마음에 극심한 스트레스, 습관적인 근심걱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일 죽음이 닥칠 지도 모른다는 그런 '무'(nothing)에 대한 공포가 엄습할 때, 우리의 마음과 뇌는 더 이상 기쁨과 희망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더욱 더 불안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불안 속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더욱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갖혀 있는데, 자비의 마음을 간직한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냥 이것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입당송에서 이렇게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시편 55(54),17-20.23 참조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내 목소리 들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대적하여도 나를 구하시리라. 너의 근심 걱정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불안은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런 불안을 하느님과의 대화, 즉 기도에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최선을 노력을 다한다면, 또다른 기회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안과 하느님의 평안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제1독서의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 30,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늘 느끼고 사는 인간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축복하시면서, 그런 하느님의 마음에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1] 마음

재의 수요일: 마음(Heart) 쓰러져가는 라테란 대성당을 떠받치는 작은 거인 프란치스코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꿈에서 보게 된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에 우리는 다시금 '마음'에 대한 말씀들을 듣게 됩니다. 요엘 예언서는 마음이 무뎌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요엘 2,1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마음'이라는 말은 '감정과 지성과 의지' 모두를 통합한 하나의 단어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온 '생명력'을 지칭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왜 그분께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요엘 2,18) 자비(Mercy)는 히브리어로 '자궁(rehem)'을 의미합니다. 즉,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오는 자녀들에 대한 한없는 열정과 사랑을 두고 자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마음은 자녀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신 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무죄하신 어린양 그리스도를 유죄의 희생양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2코린 5,21) 따라서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신 아버지 하느님 덕분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것보다 '마음'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을 깊이 살펴보고, 우리 '마음'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마음&

[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0] 사순절 다해 매일 말씀묵상시리즈를 시작합니다.

T. 평화를 빕니다.  이번 다해 사순절을 맞이하여, 매일 말씀묵상 시리즈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이런 묵상을 시작하게끔 해준 근본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8장 3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부정적 상황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런 시련을 견디어내길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우리 사람의 마음 안에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는 하느님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지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다시금 이런 아버지 하느님의 깊은 뜻을 묵상해보고자 이 사순말씀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으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이 위대한 40일 구원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서 그 안에서 "머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