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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2] 불안


우리 인간 마음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럼 왜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일을 모른다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안'(Anxiety)이고, 이 불안함 때문에 스트레스가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른다는 그 불안함 때문에 마음에 극심한 스트레스, 습관적인 근심걱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일 죽음이 닥칠 지도 모른다는 그런 '무'(nothing)에 대한 공포가 엄습할 때, 우리의 마음과 뇌는 더 이상 기쁨과 희망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더욱 더 불안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불안 속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더욱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갖혀 있는데, 자비의 마음을 간직한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냥 이것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입당송에서 이렇게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시편 55(54),17-20.23 참조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내 목소리 들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대적하여도 나를 구하시리라. 너의 근심 걱정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불안은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런 불안을 하느님과의 대화, 즉 기도에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최선을 노력을 다한다면, 또다른 기회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안과 하느님의 평안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제1독서의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 30,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늘 느끼고 사는 인간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축복하시면서, 그런 하느님의 마음에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만한 생명력을 누리고 기쁘게 살아가려면, 신앙적인 방법은 오로지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신명 30,20) 하는 길 이외에 다른 지혜는 없는 것입니다.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루카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루카 9,23-2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자신을 버리라는 말씀을 두고, 자기현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라는 것도 모든 역경과 고난을 자의든 타의든 감당해야 한다는 식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일면 그런 해석도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 존재의 불안에서 출발하면서, 하느님의 평안으로 옮아가는 그런 긍정적 희망의 목표를 위해서는 원치 않는 고통도 따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정녕 십자가 고통을 지더라도, 그로 인해 우리 마음에 벅차오르는 그분의 사랑과 평안을 헤아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평안함은 불안함을 덮은 채로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현존재 인간으로부터 출발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평안으로 나아가려고 분투하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짊어지고 있는 이 세상 근심과 걱정 때문에 주님을 잊지 않도록 하시고, 
그분의 계명을 멀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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