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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사랑받기 위하여 5] 선택

사순 제1주일(다해)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탁월한 선택을 통해서 흐뭇한 결과를 맛보며 기뻐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 쓰라린 상실을 맛보며 슬퍼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실수를 최소화하고 미래를 예측해보려는 지성의 통제력과 상상력을 빌어 올바른 선택을 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 선택과 관련하여 어떤 필요를 충족시켜줄까요? 그것은 바로 나로서는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하느님과 신앙의 선조들은 이미 가본 길, 이미 아는 길을 친절하게 인격적으로 소개해주고 계시기에, 만약 우리의 자유를 위한 선택을 할 의지만 충만하다면, 의외로 선택이 기준점이 명료해 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기준점에 대해 오늘의 말씀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6장에서는 먼저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가치를 '역사인식'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시합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떠도는 아람인들이었고, 이집트에서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그래서 저희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희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저희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신명 26,7)라는 말씀대로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청원, 그리고 미래의 기쁜 해방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 역사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연속성'이 보장이 되는 것을 우선 선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는 우리의 선택이 항상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우선해야 한다는 점도 상기시켜 줍니다. 아무리 처음에 최선을 선택하였다고 하더라도, 유한한 이 현세의 특성상 나의 선택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고통스럽고 쓰라린 결과나 오해를 맛볼 수 있는 냉혹한 현실이 받아들여야할 현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악의 길로 인도하셨다고 믿는 선택을 하는 길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 10,9)

우리가 실패라고, 좌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쓰라립니다. 누구든지 고통을 피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주님은 그런 작은 죽음들 가운데서 우리를 부활시키는 그런 주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으로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음으로 믿지 못하게, 마음을 심란케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악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분절되어 있지 않으며, 하느님께서는 어제의 실패와 쓰라림도 오늘 치유하시고 내일 더 성장시켜 주실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믿으며,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우선하는 선택을 과감히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루카복음 4장에서 유명한 유혹자의 일화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번의 유혹을 당하시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유혹자와의 담화를 빌어 우리에게 교육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우선 처음으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입니다. 인간은 물질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가치지향점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치 중심적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점이 다른 동물들과 차별점입니다. 둘째는 그리하여 기억입니다. 하느님을 지향하고자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점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유혹들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악의 유혹과 기만에서 탈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단호히 맞서는 용기를 발휘하십니다. 인간은 이렇게 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가치를 벗어난 것들을 과감히 거부할 용기를 발휘하도록 선택을 해야 되는 존재입니다. 유혹과 기만으로 당장에는 달콤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허무함을 맛보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지혜로운 말씀을 우리의 가치중심점으로 삼으면서, 항상 구원사의 하느님이라는 점을 기억하며,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힘써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아무리 우리의 자아가 보기에는 멋진 것들이라도, 악의 유혹과 기만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니,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들어높임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한 마리의 마귀는 그 모든 사람보다 천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지금은 지상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모든 사람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또한 기적들을 행하여 악령들이 달아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해가 되고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 안에서 아무것도 그대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권고 5,6-8

댓글

  1. 늘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자신의 기준이 늘 모호하다는 것을 장애처럼 많이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는 이러한 류의 식별을 청하는 글들을 많이 접하고 읽으려 노력을 많이 합니다. 아마도 가장 자신이 바라는 그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나왔다고 믿습니다만, 거기서 꼭 어떤 이기심이 발동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것은 맞갖은 발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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