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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성경에서 배우고, 기도로 느끼고' 1]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출발점이란?

많은 교우분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또한 수도사제인 저 스스로에게도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어디서부터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가?'입니다.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시거나, 준비하시는 그런 새교우나 예비교우들, 그리고 이미 신자가 되신 여러 스펙트럼의 교우들께서 질문하시는 공통의 질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되새기는 동시에 또한 기도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출발점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같이 고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기도를 이해하려면 성경적인 세계관(World-view) 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다시 쉽게 말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흘러가서, 어떻게 종결되는가?'에 대한 가치체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상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창조론' ,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이 구원을 얻었다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 , 그리고 나중에는 주님에 의해 의인과 죄인들이 그 삶에 의해 심판을 받고, 이 지상과 천상이 모두 하나가 되는 그런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 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창조-구원-종말'이 모두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연속적인 '시간'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 시간을 경영하시는 분 또한 시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 세계관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에서 말하는 세상창조(자연창조) 및 인간창조, 그리고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과 그 믿음, 마지막으로 요한묵시록에서 제시하는 여러 징표들을 통해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는 종말론으로 세상은 그렇게 '일직선'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4] 세례명 '마르타' (Martha, Marta)는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베타니아의 성녀 마르타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부산을 떨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루카 10:41~42, 200주년 신약성서) 매년 마르타 성녀 축일을 지내면서 듣게 되는 복음이 루카복음 10장 38장부터 42장 혹은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57절 라자로의 부활사화 가운데 일부분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단 이 두 마르타가 동일인물인지에 대한 의문에 부닥치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성경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해, 이 두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는 베타니아 고을(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 출신이며, 그녀의 남동생은 라자로, 여동생은 마리아(베타니아의 마리아)라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며, 동시에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는 여느 다른 마리아, 특히 나자렛 출신의 성모 마리아와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자주 활동과 믿음, 신앙과 실천 사이의 딜레마에 대한 강론이나 신앙적인 담화를 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과연 이 '마르타'라는 이름 그 자체의 어원에서 무엇인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의구심도 가져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 이름 속에 나타나는 영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마르타 혹은 마르테' (영어로 Martha, 이태리어로 Marta, 프랑스어로 Marthe)라고 지칭하는 이름의 어원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두 가지로 나뉘어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을 최초로 기록할 때 사용한 성경 히브리어를 이야기하고, 현재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의 조상격인 언어가 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가 중간에 변화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3] 세례명 '라우렌시오'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일까요?

순교자 성 라우렌시오 부제 초기 로마교회에는 일곱 명의 부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바로 이 '라우렌시오'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주후 257년에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박해로 인해 순교를 당한 분입니다.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당시의 교계제도에 속해 있던 교황과 지역주교들을 탄압하고 박해하는 바람에 정말로 큰 박해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라우렌시오 부제도 순교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라우렌시오 성인의 이름을 원래 라틴어로 표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Laurentius. 즉, 라우렌티우스라고 발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2가지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태리 라치오 지방 (현재도 Lazio라고 하고 있고, 원래는 라티오 Latio라고 하였음, 로마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름)에 속한 Laurentum (라우렌툼)이라는 도시에 살았던 남자거주자라는 뜻에서 Laurentius라고 라틴어식으로 남성명사화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가 살았던 지역에 라틴어로 laurus, 영어로 "laurel"이 풍성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월계수'를 의미하는 라틴어와 영어단어입니다. 즉, 그가 살았던 지역에 월계수가 풍성하여서, 월계수를 뜻하는 라틴어 명사 laurus에서 유래한 지역이름 및 자신의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여서 해석한다면, laurentius는 월계수가 풍성한 지역에 사는 남자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콘에도 나타난 것처럼, 아마도 전통적으로는 전자보다 후자에 의미를 더욱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피의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색 부제복을 입고, 오른손에는 영광의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가 잡혀서 석쇠에 굽히는 고문을 당했던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문을 지켜보던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자신의 고문을 더욱 더 가열차게 할 것을 요청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2] 세례명 '테레사' '테레즈' '테레지아'는 무슨 뜻을 지니는 것일까요?

중세시대 스페인의 아빌라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테레사(Theresa of Avila)라는 수녀로 인해, 유럽에는 이 테레사라는 이름이 교회 안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프랑스 리지외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프랑스어식 표기인 테레즈 ( Thérèse )라고 이름을 가진 수녀가 아주 유명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이름인 이 테레사라는 이름을 가진 스페인과 프랑스의 성녀들로 인해 이 이름은 아주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영어로는 Tracy (트레이시), 독일어로는 Theresia (테레지아), 프랑스어로는 Thérèse (테레즈), 이태리어로는 Teresa (테레사)라고 표기하고 읽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어별 표기가 동일한 인물인 테레사를 지칭한다는 점이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2016년 여름인 지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머물고 있습니다.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비엔나에 머물면서,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머물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렇게 이 나라를 이끌었던 유럽의 최고 왕실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관심도 특별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과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가 하나의 나라였고, 또한 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 아래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요한 슈트라우스 등등의 음악적 거장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최고의 클래식 명작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면서, 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에게 눈길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프란츠와 무려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6명은 죽고 10명만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엄청난 역사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아주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31] 세례명 '보나벤투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성 보나벤투라, 축일 7월 15일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지식과 경험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경험을 축적한 후에 종합한 지식과 지혜로 삶을 살아갈 것이고, 또 다른 경우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쌓아놓고 정리해놓은 것을 학습을 통해 먼저 익힌 후에 살아가는 그런 선 지식 후 경험의 방식을 택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들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후자와 같이 많은 지식을 먼저 습득한 후에 삶에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그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지식 습득이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식도 지식이지만, 결국 그것을 삶에 적용하면서 깨닫는 지혜가 더욱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 보나벤투라 성인은 어떤 경로를 택하여 성인에 오르게 되었을까요? 많은 지식을 축적한 후에 삶을 살아보면서 깨달았을까요? 아니면 먼저 경험을 해보면서 얻은 지식을 종합정리하였기에 성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일까요? 일단 일면에서는 그가 학자였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섭렵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신학과정에는 많은 철학적, 신학적 명제들을 주해하는 '명제집' (Sententiae)이라는 것에 대하여 연구할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친 것이 아닌 성인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고, 또한 총장으로서, 추기경으로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경험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모든 것을 집대성하여 하나의 이론으로 엮은 그런 '지혜'로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는 바로 다름이 아닌 신앙이 주는 열정과 사랑으로 불타올랐기 때문에, 불타오르는 사람이라는 뜻의 '세라핌' (Seraphim)이라는 수식어가 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