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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4] 세례명 '베로니카'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길 제6처 베로니카가 예수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십자가의 길을 바치다보면 제6처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바로 '베로니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피땀을 닦아주는 여인을 두고 진정한 주님사랑을 보여주는 여인으로 기억하십니다. 이 '베로니카'라는 이름 안에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 이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Βερενικη (Berenike, 베레니케)라고 합니다. 이는 마케도니아(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지역명) 방식의 그리스어에 해당되며,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Φερενικη (Pherenike, 페레니케)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φερω ( phero ) "to bring" 그리고   νικη ( nike ) "victory". 그래서 '페로니케'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이고, 결국 뜻은 'bringing victory', 즉 승리를 가져온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베레니케'라는 이름이 라틴어식 표기법을 따라서 'Veronica' 베로니카라고 변화가 됩니다. 동시에 이 의미도 약간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Vera icon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로 'true image'라는 뜻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을 닦는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였다는 데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어이름으로 이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1517년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영어이름에 많이 사용된 것에는 그 이름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들어온 시점인 19세기 이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오늘의 복음묵상] '기름(oil)'의 아름다움

2016년 3월 21일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한 액체 세 가지를 꼽으라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물, 술 그리고 기름. 물은 잘 아시다시피 생명과 생활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액체입니다. 물이 없다면 우리는 생명도, 그리고 여러 가지 일상생활도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액체입니다. 그래서 물은 '살아있게 만드는' 액체입니다. 술은 어떨까요? 술은 선호도에 따라서 필수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행사와 분위기,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매우 필요한 액체입니다. 심지어는 술이란 액체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들이는 정성을 통해, 그것을 종교의식이나 조상공경지례(조상제사)를 지낼 때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액체입니다. 그래서 술은 '대화하게 만드는' 액체입니다. 그럼 기름은 어떠합니까? 특별히 석유는 오늘날 모든 산업과 문명의 출발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타 다양한 기름은 식용유, 윤활유 혹은 아로마 오일, 즉 향유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기름이란 그래서 '풍요롭게 만드는' 액체입니다.  그러면 어느 액체가 가장 '아름다운' 액체일까요? 생각하시는 바에 따라서 '술'이라고 말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물'이라고 말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의견에는 바로 이 '기름'이 아름다운 액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아름다운가? 그것은 고전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고대철학에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움'이란, 바로 '균형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따라서 생각이든 말이든 행동 등등의 무엇이든지 '서로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름'이 아름다운 액체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바대로&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3] 세례명 '요아킴'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일까요?

<성모 마리아의 성가정> 성 모 마리아의 부모님의 성명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아버지는 요아킴, 어머니는 안나라고 합니다. 안나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아킴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 요아킴이라는 이름에도 어원적, 영성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성모 마리아의 친부인 요아킴을 기념하는 축일은 가톨릭교회에서 7월 26일입니다. 반면 동방정교회에서는 9월 9일에 기념한다고 합니다. 그럼 이 요아킴이라는 단어는 대체 어느 언어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이 요아킴이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Joakim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 명사에서 나온 단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יְהוֹיָקִים Yəhôyāqî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시 두 부분으로 형태를 분할할 수 있습니다. יְהוֹיָ/my YHWH(GOD), '나의 야훼께서'와 קִים/Has raised or established, '일으키셨다, 세우셨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가 합쳐진 명사가 되면서, 결론적으로 '나의 야훼께서 일으키셨다(세우셨다)'는 뜻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이런 이름은 성모 마리아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매우 심오하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요아킴'이라는 이름이 주는 영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야훼 이레의 영성'입니다. 이슬람에서 한분 하느님의 뜻대로를 지향하면서 '인샬라'라고 답하듯이, 구약에서는 한분 하느님의 뜻대로를 지향하면서 '야훼 이레'라는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일으키시고, 계획하시며, 세우신다는 점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일으키시고 세우신 사람이며, 그로부터 나온 딸이 성자의 어머니요 구원의 동반자가 되신 성모 마리아가 되셨으니 그렇습니다. 비록 요아킴이라는 이름을 세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2] 세례명 '니콜라오'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세례명 가운데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바로 '니콜라오'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배우나 유명인사들의 이름은 이것의 영어식 표기로써, Nicholas, Niccola, Nick 등등이 있습니다. 과연 이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는 것일까요? 원래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이 Nicholas는 이런 두 가지 그리스어 명사의 혼합명사라고 합니다.그리스어로 νίκη nikē 'victory' and λαός; laos 'people', that is, victory of the people, 이런 식으로 합성된 명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의 승리'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지닌 성 니콜라오는 이러했다고 나옵니다. I n 325, he was one of many bishops to answer the request of Constantine and appear at the First Council of Nicaea . There, Nicholas was a staunch anti- Arian , defender of the Orthodox Christian position, [22] and one of the bishops who signed the Nicene Creed . [23] Tradition has it that he became so angry with the heretic Arius during the Council that he struck him in the face. [24] <출처: 위키피디아>  그래서 이 성인은 당대 위협으로 떠오르던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교회의 변호자로서, 그 이단에 맞서 싸우고 물리친 교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니콜라오라는 이름에 걸맞게 '백성을 위한 승리'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결코 허구나 상상의 내용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그런 부류의 일들이라면, 우리가 믿는 이 모든 것

[오늘의 복음묵상] '호산나, 그리고 반전'

2016년 3월 20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관전할 때에, 가장 중요한 선수가 등장하거나 교체선수로 투입되었을 경우에 많은 환호와 기대를 담아서 그 선수의 이름이나 팀명을 연호합니다. 단체로 그 선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선수가 아주 잘 하면 더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선수의 불찰로 인해서 미스가 생겨 경기에 패하게 되면 그 선수는 거의 매장을 당하게 됩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그 사람을 비판하고, 그런 선수를 기용한 감독의 용병술에 대해서도 단단히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합니다.  신앙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일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이라고 하고, 그분을 이 세상이라는 필드에 기용하신 대표감독이 성부 아버지시라면, 우리들은 그 주장의 등장에 연호하거나 혹은 비난을 쏟아붓는 그런 관객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환호하며 외칩니다. '호산나~' 그런데 너무나도 냉혹한 것이,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결과들이 생길 때에는 바로 그 주장선수의 '플레이'가 너무 좋지 않다는 비평을 합니다. 그러면서 별로 그 선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그 '주장'과 '감독'은 자신들의 소중함을 알아주지 못하는 관객들로 인해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나 묵묵히 참아냅니다. 이 '호산나'라는 연호, 이 뜻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와 유사한 '아람어'라는 언어가 있습니다.거의 히브리어와 같은 어근을 사용하는데,  Hoshea; Joshua, “salvation”와 같은 가족에 속하는 hôshia-nā’(호쉬아-나)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이 동사 자체가 바로 To save, to help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말 자체로서 바로 '도와주소서, 구해주소서!'라는 호소이자 간접명령문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형을 당하려 입성하시는 예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1] 세례명 '안드레아'에는 어떤 뜻이 담겨진 것일까요?

성 안드레아 사도 형제님들의 세례명 가운데 자주 사용되는 이름이 바로 이 '안드레아'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스페인에 가면 이 '안드레아'는 여성의 이름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는 안드레아가 남자만의 이름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안드레아'라는 이름도 그 안에 숨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안드레아의 그리스어 이름은 바로 Ανδρεας (Andreas)입니다. 이는 ανδρειος ( andreios )라는 형용사인데, 그 뜻은 "manly, masculine"이라고 해서 '남성다운, 혹은 인간다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 첫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에 해당됩니다. 안드레아라는 이름 안에는 남성적인 당대함, 혹은 인간적인 따뜻함과 신앙의 열정을 가진 사도의 모습 등이 공존합니다. 그렇다면,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주는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의 근본형이 인간을 지칭하는  ανηρ ( aner )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형제님이라면 남자로서 가지는 당당함과 용기있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고, 자매님에게 해당되는 이름이라면,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 또한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이자 주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아', 우리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할 때마다 용기있는 주님의 사람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하도록 합시다.

[오늘의 복음묵상] 인간적이고 자비로운 그리스도교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요한 8,1-13 종종 해외토픽을 통해서 전해듣는 소식들 가운데, 아직까지 여성에게 투석형을 가하는 법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가차없이 투석형을 통해 여인을 사형시키는 곳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묻게 됩니다. 과연 그 나라에서는 여성이란 존재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냥 부속물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여성도 인간으로 여기는 것일까? 법의 글자가 있고, 사람의 존엄과 평등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아마도 전자가 더욱 중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전통에 있어서 그들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법을 집행한다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할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비록 종교가 다르고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들에게 이런 저런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런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동일한 근원에 대해 생각하고 각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한 동등한 근원에서 온 동일한 본성의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인권경시풍조를 다소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이 이야기해주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요한복음 8장이 후대편집에서 새롭게 삽입된 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요한복음의 신학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 요한복음저자의 신학과는 좀 다른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증언이 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애'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로, 자궁으로 지은 간음죄를 하느님의 '자비'로 교체해주십니다. 그렇게 용서해주십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여성의 자궁은 rehem(레헴)이라고 하고, 그것의 복수형인  rahamim(라하밈)은 '자비'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궁으로 지은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20] 세례명 '그레고리오'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일까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성인들 가운데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초세기의 성인들을 비롯해서, 교황님들의 이름에도 등장하는 그런 유명한 이름입니다. 과연 이 '그레고리오'라는 이름 안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일까요? 이 그레고리오, Gregorio라는 이름은 최초 그리스어 동사로부터 기원합니다. 그리스어 동사 γρηγορεύω라는 동사로부터 기원합니다. 이 동사의 뜻은 "to keep awake, be vigilant, wake, (be) watch(-ful)."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주 영민하고, 주의 깊은 사람이며 동시에 늘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이 주는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늘 '주님께로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유혹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유혹은 우리의 양심과 의식을 잠재우고, 타성에 젖게 하고, 더 이상의 생동감을 찾는 노력마저 멈추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신앙생활을 비롯한 나머지 삶 전체가 모두 그저 반복되는 틀 속에서 습관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가운데, 원래의 나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레고리오'의 삶입니다. 다시금 반추해보고, 다시금 깨어있고, 또한 그렇게 유혹과 태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을 두고 '그레고리오'가 되는 삶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이어지는 우리의 인생에서 얼만큼 늘 깨어있고, 또한 신중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19] 세례명 '젬마'에는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요?

술모나의 성녀 젬마 매년 5월 12일에는 이 이태리 술모나의 성녀 젬마를 기립니다. 이 젬마 성녀는 이태리 술모나 교구에 속한 고리아노 시꼴리(Goriano Sicoli)에 은둔소를 짓고 42년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성덕을 쌓았고, 성녀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성녀 젬마 갈가니 또한 매년 4월 11일에는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카밀리아노(Camigliano)에서 태어난 젬마 갈가니라는 여인은 예수 고난회 수녀가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마침내 고난회의 수녀가 된 이후에, 그녀에게 많은 환시와 악마의 습격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손과 발에 뚜렷한 오상의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1903년 4월 11일 선종한 후, 그녀에 대한 대중신심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40년 5월 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녀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현재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인 루까(Lucca)라는 곳에 있는, 성녀 젬마 갈가니 성당에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렇게 두 젬마 성녀는 교회 안에서 완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젬마라는 그 이름 자체에 대해 궁금증이 더해 갑니다. 과연 이 젬마라는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젬마, 즉 Gemma라는 이름은 중세 이태리에서 부르던 별명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 이태리식 여성이름인 젬마는 원래 뜻이 'Gem'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영어단어인 이 'gem'의 뜻은 '보배, 보석'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귀중한 보석의 원석을 두고 gem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자랑거리'라는 뜻도 가지게 됩니다.  이 젬마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13세기의 유명한 거성(巨星)인 단테의 부인이름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단테의 명성에 힙입어, 얼마나 귀하고도 보배로운 여인이었겠습니까? 그런 별명에 의해서

[오늘의 복음묵상]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

2016년 3월 6일 사순 제4주일 예전에 어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학생들인 저희에게 그러셨습니다.  "여러분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인지 압니까? 그것은 일생토록 책 한권만 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사람은 누구인지 압니까? 그 책 한권을 50번 읽은 사람이, 50권의 책을 읽은 사람보다 더욱 더 무섭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여러 종류의 문제에 대해 해석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있어서 다면적일 수도 있고, 또 일면적일 수도 있습니다. 위의 말이 강조하는 바는, 그 일면성이 깊이 고정되어서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을 모르거나 배제하는 그런 편협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렘브란트, 잃었던 아들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 렘브란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의 복음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아버지의 손이 두 종류의 손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손은 여성의 손, 왼손은 남성의 손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에게는 모성과 부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작가는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사용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스이 품어내는 어머니의 모습과 계도해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일면적인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죄라는 결실과 아들이라는 인간의 측면에서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큰아들도, 바리사이도 모두 하나만 강조하려고 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는 길로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생각이나 판단이 가장 우선하지는 않는지요? 그리고 우리도 한권의 책만을 50번씩 읽은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인물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처럼, 우리는 적어도 다면적인 사고방식을 키우려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