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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삼위일체, '성령'께서 알려주신 비밀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종교는 저마다 핵심교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치 회사의 영업기밀이 있듯이, 각자의 핵심교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비'로 믿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슬람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유일무이한 자신의 예언자로 무함메드를 파견하셨다는 점이며, 그를 통해 축적된 어록과 후대의 기록이 합쳐져서 현재의 거룩한 '쿠란 (이슬람식 발음은 쿠란임)'이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자비를 품으신 유일무이한 단일성을 지닌 절대신이고, 인간은 그분을 결코 죽음 이후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 없는 절대적 비가시성의 신비로운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이슬람의 신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유다교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이뤄지고, 그 민족에게 약속한 '땅'을 주시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 셨으므로, 자기 민족들의 '하느님'이시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구세주 메시아 사상'이란 아직 도래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것이 큰 의미를 차지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민족적 신비주의'에 여전히 방점을 둔 자신들의 '비밀'로 남겨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는 어떨까요? 불교의 '신비'는 이렇습니다. 불교는 절대신의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알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되려 인간의 조건에서 출발해서 여러 수행을 통해 상승하는 '구도자의 구도'를 설파하는 것이 불교의 '신비'라고 하겠습니다. 사성제인 '고집멸도', 즉 모든 것은 고통이며, 불교의 인연(인과응보설)에 의해 '집착'으로부터 발생되었고, 이를 '사멸

[오늘의 복음묵상]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다처럼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33 브라질의 대주교요, 사회의 정의평화운동에 앞장섰던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기도문 하나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침묵의 세계를 위한 기도>  주여, 당신 영을 보내 주소서. 성령만이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이기주의를  깨뜨려 버릴실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묶어 두는 불공평한 구조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도우시어, 참으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까마라 대주교는 성령으로 인해서만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고, 성령을 통해서만 그 이기심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해방될 힘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힘을 통해서 이기심을 털어버리고, 모든 불평등한 구조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참으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하나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흔히들 꿈꾸는 유토피아적 세계의 건설이 거창한 모토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의 영께서 임하시길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누구신가? 이런 질문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저는 성령은 '거듭나게 하는 효력'을 보여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해를 밥먹듯이 하던 유대인 랍비 '사울'도 다마스커스의 성령체험을 통해 완전히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작은 종이란 의미의 '바오로'라는 이름을 갖고 새롭게 거듭 났습니다. 니코데모도 요한복음서에서 어떻게 사람이 두번 태어날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특효를 언급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이 완전히 반전이 되어서 굉장히 새롭고도 맹렬하게 다가가는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바로 가톨릭신학의 역사중심주의에 의해서, 성

[오늘의 복음묵상] 아래로부터의 희망

[주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 두바이에서 처음으로 버르 칼리파를 방문했던 시절을 회상해봅니다. 총 2번의 기회가 있었고, 두번 모두 다녀오니 더 이상의 흥미가 없어졌습니다. 비싼 티켓을 주고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면 쉬지 않고 바로 전망대까지 가버리니 말입니다. 그리고 전망대에서도 그냥 두바이의 전경을 구경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아래층부터 차근차근 좀 둘러볼 수 있게 하였더라면 좀 더 흥미로웠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엘리베이터와 관련되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스님과 신부님 사이에 있었던 농담이라고 합니다. 하루는 스님이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좋겠습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스님?" "천주교는 엘리베이터에 타기만 하면 곧장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데, 우리는 수계생활을 해서 계단을 쉼없이 올라가야 하니 말입니다. 끝에 당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구요." "아 그런가요 스님?" 이렇게 가톨릭신앙이 다른 자연종교보다는 좀 더 수월하게 구원에 당도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농담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가톨릭교회가 "아래로부터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약속을 부여잡고서, 언제나 아래로부터의 희망을 간직하고 '상승하는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신원의식이 바로 승천이 가르쳐주는 믿음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을 두고 '순례자 인간(Homo viator)'이라고 라틴어로 표현합니다. 지금의 현세로부터 상승하는 희망의 여정을 따라서 계속해서 나그네로 걸어간다는 것이지요. 걸음을 멈추지 말라는 격려의 메시지도 함께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법보다는 보편구원이 더 선행하고, 위로부터의

[오늘의 복음묵상]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지난 주에 이어서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지니는 역사적 배경상, 계명에 나온 글자 그대로의 윤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 둘러싸인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여 주시는 새로운 계명을 중심으로 단결하면서 차별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글자 그대로의 계명이 아니라 바로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에 대한 해석이 교파별로 다양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역시 예수님의 계명 그 자체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에 열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열심히' 믿는 길을 걷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거기에서 이탈할 경우에는 구원은 없다는 식의 다소 배타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계명의 자구적 의미도 중시하지만, 이것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역사와 연결시키는 관점이 대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인과 사회에 일어나는 여러 역사적 상황과 예수님의 계명, 그에 대한 믿음,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에 대해 좀 더 현실참여적인 해석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하게'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상의 역사 내에서 교제를 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계명을 바라볼 때 계명의 표현만 바라볼 수 있으나, 계명의 정신을 바라볼 때에 진정 참된 이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전자가 개신교식 이해일 것이고, 후자가 가톨릭적 이해일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었고 변화가 되었으며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역사의식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톨릭적 해석일 것입니다. 사랑은 그냥 좋은 감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