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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다처럼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33

브라질의 대주교요, 사회의 정의평화운동에 앞장섰던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기도문 하나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침묵의 세계를 위한 기도> 
주여,
당신 영을
보내 주소서.
성령만이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이기주의를 
깨뜨려 버릴실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묶어 두는
불공평한 구조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도우시어,
참으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까마라 대주교는 성령으로 인해서만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고, 성령을 통해서만 그 이기심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해방될 힘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힘을 통해서 이기심을 털어버리고, 모든 불평등한 구조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참으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하나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흔히들 꿈꾸는 유토피아적 세계의 건설이 거창한 모토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의 영께서 임하시길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누구신가? 이런 질문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저는 성령은 '거듭나게 하는 효력'을 보여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해를 밥먹듯이 하던 유대인 랍비 '사울'도 다마스커스의 성령체험을 통해 완전히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작은 종이란 의미의 '바오로'라는 이름을 갖고 새롭게 거듭 났습니다. 니코데모도 요한복음서에서 어떻게 사람이 두번 태어날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특효를 언급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이 완전히 반전이 되어서 굉장히 새롭고도 맹렬하게 다가가는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바로 가톨릭신학의 역사중심주의에 의해서, 성령께서 창조때부터 함께 하셨고 회개도 견인하시고, 격려와 완성의 기관차로 자리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한 개인의 역사 안에서의 출생부터 극적인 고비들과 반전, 그리고 궁극적인 완성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성령 하느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의 반전도 이하불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전개되는 개인과 사회의 역사, 특별히 성령 하느님께서 견인하시는 개인과 사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의 답이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다처럼' 흐르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목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우선 하느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모든 사고와 판단과정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그분의 가르침이, 그분의 느낌이 자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라져 있는가? 바로 이것이 정의의 현존이냐 부재냐와 관련이 됩니다. 신앙적으로는 행위의 결과에 따른 처벌은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관계차원에서 정의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만약 정의가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던 우리와 함께 있다면, 그것을 두고 바로 평화라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정의의 열매가 바로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그래서 하느님이 언제나 모든 시간과 생각과 판단과 행위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체감할 때 표현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는 고요와 적막한 상태가 평화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충만한 현존인 평화가 바다처럼 흐른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리고 한 개인의 삶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도 국가적 차원에서도 남과 북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꿈꾸는 것입니다, 한번도 꿈꿔보지 못했던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한번도 바래보지 못했던 것을. 이룰 것입니다, 한번도 이뤄보지 못했던 것을. 

성령의 일곱 은사와 열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충만히 이 땅에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빛나실 수 있도록, 우리 각자의 삶과 사회적 비전을 역사 안에서 발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큰 것을 향해, 더 멀리 보고, 더 용감하게 전진하도록 합시다. 오늘도 행복하게 지내길 기도하며, 또한 동시에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다처럼' 흐를 수 있도록 열망합시다. 나만, 나에게만, 내 인생만이라는 이기심의 감옥을 성령 하느님이란 Keyman께서 활짝 열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다처럼' 흐를 수 있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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