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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연중 제33주일 (나해, 세계 빈민의 날)

오늘 처음 들으신 다니엘서는 다니엘서 가운데 제일 자주 인용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주로 ‘신앙이란 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합니다. 1절에서는 일찍이 없던 재앙의 때, 절망의 때가 오겠지만 대천사 미카엘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찾아와 그런 부정의 때를 종결시키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소개하고, 3절에서는 어떤 부정적인 난관을 맞닥들이더라도 신앙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았던 그런 ‘현명한 이들’의 표양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의미를 널리 알려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고난’을 견뎌내는 믿음입니다. 마치 배를 항구에 묶어둘 때 끊어지지 않도록 단단한 쇄사슬을 이용해서 중심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둔 것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이런 맥락에서 그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히브리서가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이전의 사람들이 가진 믿음이 굉장히 ‘인과율적 희생제사’를 통한 믿음이였다면, 즉 잘못을 한만큼 번제물을 바쳐야하는 방식이었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은 ‘황금률적 감사제사’를 통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8절의 말씀처럼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확증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단순히 삶의 고난으로부터 떠밀려서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내에 초점이 맞춰진 신앙이었다면, 신약에서는 이제 가벼워지고 해방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내적자유가 신앙으로 인해 믿는 누구에게나 공짜로 주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굉장히 의미가 큰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은, 그렇게 황금률적, 감사제적, 내적 자유를 갈망하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궁극적인 종말에는 어떤 것들을 겪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합니다. 종말론적 기대를 표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각종 불안한 징표들이 나타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공포감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는 시간’을 안다는 척 떠들어대는 거짓예언자이니, 그런 목소리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 강화하는 점에 포커스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황금률적 감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이 제시하고자 하는 종말론적 이미지입니다. 종말이 오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라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 다가오고 있더라도 나의 말씀의 힘을 굳게 믿고 희망을 잃지 말아라는 점이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인생의 크고 작은 난관들로 인해 희망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믿음이 대체 내 인생에, 우리 가정에 무슨 기여를 한다는 말인지, 말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허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에 다니엘서의 가르침을 기억합시다. 믿음에 머무는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랑과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바로 이럴 때에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기억합시다. 이런 재난은 결코 인과율적인 것이 아니며, 주님이 물려주고자 하시는 전례의 가르침은 ‘황금률적 감사제’라는 것임을, 바로 이럴 때 마르코복음의 종말론을 기억합시다. 말씀의 힘을 굳게 믿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더욱 더 내적 자유와 외적 자선에 더욱 더 열심하라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이 세계 빈민의 날로 계속해서 기념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부활의 후손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으면서 이번주도 마르틴 루터의 묘비에 새겨진 유명한 문구의 의미를 기억하는 뜻깊은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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