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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15의 게시물 표시

[오늘의 복음묵상] 말씀의 후손들, 그리스도인

2015년 12월 31일 복음묵상 요한 1,1-18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할 때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 바로 "우리는 말씀의 후손, 책의 종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그 말씀이 처음 계시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다윗에서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을 두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구전전승에서 기록전승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성경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 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할까? 정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의식을 구성하는가?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발휘되도록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개방하는가? 여기에 대해 물어보면, 거기에는 바로 우리의 신앙유무가 자리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느님의 말씀이 어느 것보다도 더 좋고 바람직하고 믿을만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과 의식을 구성하고 꾸미실 것입니다. 반면에,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고 그런 스토리가 있는 정도로만 여긴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서점에 흔하게 꽂혀 있는 여느 책 한권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의 서두에 등장하는 '하느님께서는 원래가 말씀이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점은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렸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 말씀을 바꿔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원래부터 말씀이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살아왔는가?' 이런 만성적인 물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12시간 후면 이미 새해가 도래하는데, 말씀의 후손인 우리들은 새해에 과연 얼마만큼의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긴요하게 받아들이려고 하고

[오늘의 복음묵상]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아드님'

2015년 12월 30일 복음묵상 요즘 우리는 루카복음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루카복음을 스케치하는 그 저자의 펜촉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믿음이 자세히 그려집니다. 루카복음을 두고 성경학계에서는 그리스 문화만을 알고 있는 이가 전적으로 복음을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유다이즘이나 기존 전통으로 독립하여, 그리스도교 믿음 그 자체가 지니는 성격을 담담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 철학에서 중시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차원에서,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그래서 유년기 이야기나 성모님께서 잉태하신 이야기 등등 일반적인 사람들이 겪는 그런 탄생 순서대로 예수님 또한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저와 같이 기술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거나 그치지 않습니다. 시메온 예언자, 한나 예언자, 사도들을 주연으로 등장시켜 끊임없이 그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고 계시하게 만드는 구조를 구축합니다. 여느 일일연속극에서 조연들이 계속해서 출생의 비밀과 그의 정체성을 암시하고 고백하듯이, 주변인물들을 통해서 겉으로는 여느 사내아이처럼 동일한 인간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하느님의 동일한 본성과 능력을 가지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면 점을 계속해서 부각시키고, 독자들이 그것을 믿고 깨닫게 합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사전배경지식을 가지지 않는 그리스도교 교우도, 자신과 동일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감할만한 소재로부터 함께 출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감수성에서 해석하면서, 보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점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측면으로 '넘어가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 알면 재미있다 1] 교회 전통 안에서 성경의 뜻을 깨닫는 네 가지 감수성들

1285년에 선종한 덴마크의 설교자회(도미니코회) 소속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성경을 읽는 네가지 감수성들(the Four Senses of Reading Bible)에 대해 라틴어 문구를 남겼습니다. "Littera gets docet ( The literal sense teaches you the narrative) ,  Qui creeds allegoria ( t he allegorical what to believe) , Moralis quid agas ( t he moral how to behave) ,  quo tendas anagogia ( and the anagogical where you are going) ." 위의 문구는 그리스도교 초기의 교부시절(the Church Fathers)부터 중세시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데에 전통적으로 4가지 감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자적 감수성 (Literal Sense): 표현 그대로, 성경에 쓰인 단어들이나 문장들의 문법적인 의미, 어휘의 기원을 묻고 연구하는 감각을 이야기합니다. 주로 전문적인 영역의 학자들이 많이 다루거나, 엄격주의를 표방하는 그리스도교 교파에서 이런 감수성을 많이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감수성 (Allegorical Sense): Allegory, 즉 알레고리라는 말이 여기서는 핵심이 되는데, 그것은 직역하면 '그것 너머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go beyond and go behind the written text'를 의미합니다. 더욱 심층적으로 읽기 위해 고민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어디로' 넘어가느냐면, 바로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해석으로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다른 성경구절들을

[오늘의 복음묵상] 빛에 대한 묵상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2,22-25 오늘 복음에서는 빛에 대한 묵상 을 다루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대조는 성경에서는 주로 윤리적인 대조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그래서 어느 길로 선택해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독자나 청자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대조를 보여줍니다. 새로운 길을 '비추어'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준다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또한 빛은 조명을 이야기합니다. 플라톤 계열의 철학에서 인간의 인식은 '절대적 이데아로부터의 조명'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한계를 지니고, 다른 초월적 절대존재로부터 그 빛을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인식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도 일면 이 사조를 수용하면서 갱신하여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과 신앙의 지혜와 지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미사전례나 개인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를 비추어주시고 인도하여 주소서." 유다이즘의 배경 속에서, 절대자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조명해준다는 것도,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도 발견되지 않는 와중에, 유다이즘의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예언자가 '사람의 아들'이 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두고 "빛"에 비유하며 해설하는 의미는, (1) 우리 곁에 함께 계시면서 동반하신다는 임마누엘 주 예수 그리스도께,  (2)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어두움을 비추어주시고 인도해달라고 간청하라는 것, (3) 그리하여 언제나 선택의 자유와 갈림길에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 이런 교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으로 가득하길

[성경과 인생] 신앙의 자유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우리는 흔히들 잘 풀리지 않는 일을 마주할 때에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이거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가야할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는 도상에서 무엇인가 원하는 방향대로 풀리지 않을 때에 그것을 두고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라고 체념하듯이 말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게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신앙을 택할 자유도 포함합니다. 동시에 신,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자유도 포함됩니다. 그리하여 신앙과 우리 자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려움과 부딪히더라도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전진하는 의지도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의 자유란, 잘 풀리지 않는 일이 나를 막는다고 쳐도 그 이면에서 항상 우리를 지도하시는 神, 즉 절대자 하느님의 현존을 끊임없이 우선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심이 깊어질 수록 우리는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습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보이는 일도, 신앙의 자유 안에서 거쳐야하는 하나의 관문처럼 여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거대한 자유와 하느님의 깊은 자애심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 우리는 운명을 마주하되 운명론자가 되지 않도록, 신앙의 자유를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