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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완벽한 그리스도인은 필요없다.

마태 16,24-28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마태오복음의 양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복음을 믿고 따를 사람들의 제자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후자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자세로 따라야하는 것인가? 어떤 윤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복음의 대조가 되는 카운터파트는 바로 완벽주의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글자 그대로 법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태오복음이 저술되었던 배경에서는 이미 이런 완벽주의는 붕괴된 이후였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상과 충돌하던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점에서 바로 십자가 희생이라는 시련의 제자도가 등장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자 그대로 지키면서 실제로는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들에 대한 보완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대체하시려고 하기 보다, 오히려 거기에 모자란 근본정신을 보완하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이 꾸준히 마태오복음저자의 시각에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의 제자도는 곧, 완벽한 그리스도인은 필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오히려 고생하고 허약하면서도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이가 예수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시선고정을 늘 하는 이를 두고 제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고통을 강요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리고 가학적인 종교는 더더욱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위험에 빠지면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그 근본이란, 완벽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점을, 인간적인 사람이 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효경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조적 악의 고통은 제거해야 하겠으나, 본디 인간으로 갖고 태어난

['이름' 속에 '영성'이 있다 50] 세례명 '엘리야'에는 어떤 영성이 담겨진 것일까요?

가르멜 산위의 엘리야 석상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열왕 19,10) 야훼 주 하느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북 이스라엘 왕국에 보내신 예언자 엘리야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열왕 19,9)  거듭 동일한 질문을 건네시는 주님께 엘리야는 위의 답변을 반복합니다. 자신의 소명과 열정을 다해 하느님을 위해 일했는데 위협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 열정은 바로 자신의 이름의 뜻에 의해,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이미 '안배'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뜻이 이름에 숨어 있길래 그럴까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의 이름을 보면 이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로부터 기원합니다.   אֱלִיָּהוּ ( 'Eliyyahu, 엘리야후)가 원래의 이름인데, 이 말은 "나의 하느님께서는 야훼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느님'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유일신 신앙에서 바라본다면, 그분은 '신들의 신, 왕들의 왕이신 분'이라는 주인이신 하느님이라는 그런 강력하고 유일무이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느님이 바로 야훼이시라는 점은 그만큼 강력하고 유일무이한 신앙의 의미를 강조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 강력한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어디로 보내시느냐 하면, 바알신 우상숭배에 빠진 아합왕 (기원전 9세기 북 이스라엘 왕국)에 대항하여, 야훼 유일신앙으로의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드높인 예언자였습니다. 기득권들이 자신의 뿌리와 근본을 망각하고 지내면서 오히려 권력으로 우상숭배를 묵과하는 오